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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 각화사(覺華寺)
    여행기 2008. 6. 27. 11:58

    봉화 각화사(覺華寺)

     

     

    봉화는 산 깊은 동네다. 강원도 태백과 서로 살을 맞대고 사는 이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봉화를 가려면 구절양장 같은 국도를 위태롭게 가야 했지만 요즈음은 넓고 곧은 길이 나있어서 편하다. 봉화에는 이름을 떨칠만한 대찰은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가 생기면서 사고의 수호사찰로 매김 한 절이 각화사이다. 마침 우리나라 유일의 아연제련소가 있는 석포로 출장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비게이션의 부축을 받아 들렀다.

     

     

     

    춘양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로 유명해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있는 각화사는 태백산 지류인 각화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의성 고운사의 말사다. 아주 오래 전 지금의 춘양면 서동리 춘양상업고등학교 교정 자리에 남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서기 665년(신라 문무왕 5년)경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건하여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각화사로 들어가는 계곡은 그다지 길거나 깊지는 않지만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물, 청량한 바람과 귓전을 간지럽히는 새소리가 고적한 산사의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누각이라는 멋스런 이름의 월영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아닌게 아니라 달뜨는 밤에는 그림자에 취해 자신을 잊어버리고 헤매봄직한 풍광이다. 달과 노니는 것은 호수가 제격인데 실낱 같은 계곡을 옆으로 끼고 산을 두르고 섰는 월영루도 운치가 있을 듯 하다.

     

     

     

    법당 앞에 서서 멀리 경치를 조망하니 이곳이 제법 높은 곳인지 시원한 풍광이 박하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듯 눈을 시원하게 한다. 누군가가 빨래를 널고 있다. 깊은 산골이고 풍광이 좋은 곳이니 번잡스러운 세상의 경계를 넘어와 공부중인 사람인 모양이다. 예전에는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절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합격자를 많이 냈다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도 더러 있다. 경주 건천 단석산 신선사 (이 절은 김유신 장군이 문무를 닦았다는 전설이 있다)는 주지스님 방에 이곳을 거쳐간 고등고시 합격자들이 사진으로 흔적을 남겨 놓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각화사도 관광객들이 몰리는 여느 절들과는 달리 고즈넉해서 공부하기에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고찰의 분위기와 부조화를 이루는 소화전이다. 그러나 목조건물이 대부분인 사찰이고 보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삶에서도 부조화롭게 느껴지지만 필요에 의해서 같이 하는 것들도 많다. 따지고보면 부조화라는 것도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이 �분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그저 있는대로 보는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음일 것이다.

     

    “스님 도道가 무었입니까?”
    “간시궐(똥 젓는 막대기)니라”
    옛 선사들이 주고 받은 화두요 공안이다.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라는 뜻일게다

     

     

     

    태백산의 정기가 오롯이 전해지는 이 곳은 마치 산의 품에 든 것처럼 편안하다. 산도, 들도, 물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곳이 있게 마련이다.그런 곳을 우리는 길지(吉地)라고 한다. 각화사도 이름난 길지여서 다른 절에서 3개월 동안 하는 안거를 여기 태백선원에서는 9개월이나 한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하는 자연적 조건이 좋다는 것이다.

     

    각화사는 동암과 서암 등 암자를 품고 있는데 동쪽 산록에 있는 동암은 각화사에서 30분쯤 거리로 예부터 고승들이 고행하며 수도했던 곳이다. 이른바 길지중의 길지다. 동암을 지나면 왕두봉과 각화산을 지나 중봉, 백두대간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다. 
     

     

    멋진 악보다. 어쩌면 가장 알아보기 쉬운 악보인지도 모르겠다. 절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불을 하고 그 예불의 시작은 항상 법당안 종을 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종을 치는데도 법칙이 있다. 대개는 타종자의 경험으로 치게 되는데 이렇게 표현된 악보에 의한다면 그때마다 일치된 음정의 종소리를 울리게 될 것이다. 대충하지 않는 다는 것이야 말로 수행자의 마땅히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누구나 태어나 죽는 그 날까지 무었인가를 추구하는 수행자적 삶을 산다. 살아간다는 것이 곧 수행의 삶인 것이다. 나는 매일을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그 동안 수 많은 절들을 다녔지만 이곳처럼 아름다운 문 살을 본적이 없다. 볼륨있는 양각으로 새기고 단청으로 생명을 불어 넣어 둔 장인의 들숨과 날숨이 느껴지는 듯 하다.


    각화사 문 살에 핀 꽃 /김대근

     

    각화사 지을 때 보시가 많이도 왔다네요
    나랏님도, 현감님도, 아랫동네 천석꾼 영감도
    비루먹은 나귀 등에 바리바리 실어와
    기둥도 세우고 기와도 올리고 서까레도 올렸다지요
    다 지어놓고 부처님 설법을 하시는데
    앞니 빠진 개호지처럼 자꾸 법문이 흘러
    춘향목 껍질에 박히더라나요
    그래 성불은 춘향목만 했더라네요
    한 골짝 식구들이 나도 성불해야겠다고
    목단, 연꽃, 장미…, 이 골짝 꽃들은 죄다
    문을 틀어막고 산다네요
    지금도 주지스님 법문할 때는
    꽃들이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다네요

     

     

    사찰에서 제일 높은 곳에는 예외 없이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가 우리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중신앙을 버리지 않고 수습하여 보존했다. 우리의 인식에는 높은 지형적 위치를 중요시 한다. 그럼에도 산신각을 위에 배치했다는 것은 불교의 포용적 서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규모가 큰 절에는 여기에 산신, 칠성, 독성이 같이 있기도 한다. 이른바 우리 민족 고유의 삼신사상의 표현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종교분쟁들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있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념에 의한 분쟁보다 종교와 같은 신념에 의한 분쟁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오래 전 역사부터 상고해보면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상된 인간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 적이라 할 것이다. 과연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복인가 화인가?

     

     

     

    작약 꽃이 활짝 피었다. 도심에서의 작약 꽃은 이미 지고 말았지만 표고가 다소 높은 이곳에는 지금이 한창이다. 마침 먼 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의 벽을 통과하는 듯 어지럼증을 동반해 잠자던 추억 하나가 투영된다.

     

    작약 꽃 /김대근

     

    누군가 떠나야 한다면
    나도 그 길로 와야겠지
    누군가 와야 한다면
    나 또한 보내야겠지
    흘러 가버린
    먼 곳의 세월
    여울에 갇혀 버린
    한 조각 미련처럼

    내 곁에 있었구나
    작약 꽃으로 피어……

     

     

     

    기둥에 걸린 씨 옥수수에 묵혀온 작년의 소식들이 노랗게 농했다. 철이 지나도록 매달려 있다는 것은 주인이 게으런 탓이거나 파종할 밭이 사라졌거나, 차라리 사먹는 것이 경제적이어서 일 것 이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선가의 가르침에 따라 선방의 대중들이 울력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용도제외라는 낱말만큼 서글픔을 주는 단어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다녀간 이 소식을 내년까지 간직할 수 있을까? 괜스레 번거러운 마음 하나가 일렁이다가 사라진다.

     

    어릴때다. 방학을 �아 외가에 가 있을 때 모두 일터로 나가고 대청마루에 누워 있는데 나무기둥에 옥수수가 걸려 있는 것이다. 방학숙제의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그 중에 하나를 빼서 옥수수 알을 털었다. 그리고 가는 대나무를 박아서 등긁게를 만들었다. 한줌이나 되는 옥수수 알의 처리를 고민하다가 하나를 입어 넣고 씹으니 제법 고소했다. 나중에 씨 옥수수는 먼저 말리기 전에 오줌에 담가두었다가 말린다는 소리에 기겁을 했다. 기둥에 걸린 옥수수 덕에 잠깐 동안이지만  시간여행자가 되었다.

     

     

     

    계곡을 건너는 산책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 역시 용도폐기다. 다리 건너는 이미 잡초가 우거져 오랫동안 사람의 발자국이 디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리는 늘 저쪽과 이쪽을 이어주는 매개이다. 강이나 계곡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였음은 동서양이 동일하다. 서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고 동양 역시 강을 건너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도피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반야심경의 마지막은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라는 뜻이다. 산다는 것은 영원한 시간의 저쪽에서 권태를 잊어버리기 위해 잠깐 산보 나온 것은 아닐까? 천상병 시인의 시에서처럼 소풍 나온 것은 아닐까?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89호인 각화사 귀부다. 귀부는 전면 2m, 측면 1.85m의 반듯한 암석위에 높이 1.9m, 폭 1.75m 규모의 비 받침 돌거북으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바닥 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혀 있고 육각형의 무늬에는 왕자와 불자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 사찰이 태백산 사고를 외호하는 곳이어서 일 것이다.

     

     

     

     

     

     

    각화사에는 그 동안 덕 높은 고승을 아홉 분 배출했다고 한다. 사찰의 입구에는 이들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오래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이 입적했을 때 그 육신을 화장하여 수습된 사리나 유골의 일부를 넣어두는 무덤과 같은 것이다. 불가에서 육신이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여 남긴다는 자체가 무의미 할 수는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연의 정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부처의 사리가 아무리 귀한들 “너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을 새기지 못하는 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오늘 돌덩이로 서있는 고승들이 남기고자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소소소 부는 골바람을 등으로 받으며 서있다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 한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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