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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충신 정몽주 생가의 흔적
    여행기 2008. 4. 24. 22:31

    고려의 충신 정몽주 생가의 흔적


    오늘도 출장중의 짜투리 시간을 잠깐 내서 몇 번을 벼루던 포은 정몽주의 생가를 다녀왔다. 포항에서 경주의 기림사로 넘어가는 길에 문충리(文忠里)에 이르면 '정몽주선생 생가'라는 작은 간판을 만날 수 있다. 몇 번을 지나쳤지만 늘 그냥 스치고 말아 아쉬웠는데 마음 단단히 먹고 나선 길이다.


    '정몽주'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충신이다. 그가 한창 사회의 동령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왕조가 쇠락하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때였다. 신진세력인 이성계는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유림(儒林)과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켰고 성공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하려면 기존 정치인이 필요하게 마련이었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하기로 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시로 정몽주의 의중을 떠 보았지만 정몽주는 "이 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여 넋시라도 잇소 업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쉴 줄이 이시랴."라는 답시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결국 정몽주는 개성의 선죽교 돌바닥에 붉은 핏자국을 남긴 채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문충리(文忠里)라는 지명은 '정몽주'에게 내려진 시호인데 아마 그의 출생지인 곳이라는 의미로 지은 듯 하다. 국도에서와는 달리 마을에 들어오니 간판이 사라지고 없다. 마을 회관에 차를 대고 살펴보니 마을의 중간쯤에 오래된 나무와 그 앞에 비석이 보여 걸음을 재촉해 보았지만 최근에 식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난감해 돌판에 잠깐 걸터 앉아 있는데 마침 논일 나온 노인이 있어 잡고 물어 겨우 길을 잡았다.


    민가를 지나 사람하나 겨우 지나칠 정도의 작은 길을 어렵게 지나니 몇 개의 묘소가 보인다. 집터는 흔적도 없고 황량함만 가득하다. 개울 건너 밭에다 소나무 모종을 식재하고 있는 부부에게 물으니 바로 옆 유실수를 심어 놓은 밭이 바로 정몽주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이란다.


    "저기 밖에 있는 간판을 보고 가끔씩 오긴 하는데 여긴 간판도 없고 해서 찾기가 어려워요"
    "동네 이름이 그 분의 시호를 땄는데도 관리가 안됩니다"
    "지금은 사유지가 되어서 어쩔수도 없어요"

     

     
    잠깐 그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가자. 정몽주[鄭夢周]는 고려말의 학자·정치가다. 그는 1337(충숙왕 복위 6)에 태어나 1392(공양왕 4)에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1362년 예문검열이 되었다. 1364년 왕명에 따라 이성계(李成桂)의 휘하로 삼선(三善)·삼개(三介)를 쳤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다. 〈주자집주 朱子集註〉를 유창하게 강론하여 각광받았다.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색(李穡)은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했다.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전임했다. 1386년 명에 가 명의 갓과 의복을 요청하고 해마다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이를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했다.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같은 해 도당(都堂)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나라에 충忠을 받친 사람들은 모두 곤고한게 우리 민족의 전통인가 보다. 서울에 있던 몇 만 평의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이시영 선생의 후손은 80여만원의 연금으로 궁색하게 사는가 하면 다른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그 보다 더 가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선조가 친일한 사람의 자손은 물려받은 땅으로 몇 십 억, 몇 백 억대의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라니 한심한 일이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유실수의 재배로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한 충신의 표상, 정몽주 선생의 생가 유허에서 가슴이 미어졌다.

     

     


    공무원들의 무관심도 안타까웠지만 문충리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큰 문제인 듯 하다. 자신들의 마을 이름이 정몽주 선생의 출생지라는 뜻에서 그의 시호에서 따왔음을 망각한 것일까?


    만난 마을 사람은 두 사람이다. 나라에서 무었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공무원 탓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갑갑해지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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