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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 남장사에서 만난 이백(李白)
    여행기 2008. 7. 3. 08:13

     

    상주 남장사에서 만난 이백(李白)


    동양 문학에서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대단하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했던 두사람이지만 시의 성향은 뚜렸한 차이를 보인다. 이백이 낭만주의 시를 주로 썼고 두보는 현실주의적인 시를 썼다. 또 이백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았다면 두보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두보가 시성(詩聖)으로 이백이 시선(詩仙)으로 상찬받는 이유다.  이 두 시인은 시로 관리를 등용하는 중국의 과거제도를 모방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다.


    달과 술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 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로 중국최초의 여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즉위한 장안(長安) 원년(701)에 태어났다. 그의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현종(玄宗, 712~756 재위)과 숙종(肅宗, 756~762 재위) 양대로서 양귀비로 인한 안록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이 연달아 일어나 당나라의 존망조차 기약할 수 없는 혼란기였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에서 이백과 두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두보는 인간으로의 복귀와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부르짖은 반면 이백은 현실에서의 초월을 택했다. 그저 술을 마시고 달빛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주태백이라 부르는 것에서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백이 처음부터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四川省 江油縣 靑蓮鄕 지방에서 각종 전적을 두루 읽어 많은 소양을 쌓았으며 청년기에 중국 전역을 유람하였고 장년기에 3년 동안 출사하여 벼슬을 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두보와 교유하였다. 벼슬을 사임하고 도교에 의지하여 방랑생활을 하다가 55세에 안록산의 난을 맞아 영왕(永王)의 막부에 참여한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야랑(夜郞)으로 유배당하는 도중 특사로 사면되었다. 그 후 대종(代宗) 보응(寶應) 원년(762) 11월, 당도(當塗)의 현령인 족숙 이양빙(李陽氷)집에서 62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후일 그의 일생은 전기적인 색채로 많은 부분이 채색되어 각종 신기한 전설과 고사가 전해온다. 곧 어머니의 꿈에 태백성이 품으로 들어왔다는 ‘장경입몽(長庚入夢)’, 어려서 할머니가 쇠몽둥이를 갈아 작은 바늘 만드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철저마침(鐵杵磨針)’, 꿈에 자신의 붓끝에서 꽃이 피어나 훌륭한 문장가가 되었다는 ‘몽필생화(夢筆生花)’ 등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장안에 머무를 때는 당시 태자빈객을 지낸 재상 하지장(賀知章)으로부터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 즉 ‘천상적선인(天上謫仙人)’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취한 상태에서 양귀비(楊貴妃)에게 벼루를 갈아들고 서 있도록 하였고, 권력자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한 소위 ‘귀비봉연(貴妃捧硯)’, ‘역사탈화(力士脫靴)’의 고사도 있었으며, 만년에는 당도의 채석강에서 배를 타고 술취한 채석강 속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한 후 고래를 타고 상천하였다는 ‘기경상천(騎鯨上天)’의 전설도 전해온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에는 거의 교학적인 탓에 사찰이 시중에 주로 있어으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직후 중국으로부터  선종(禪宗)이 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산중에 자리 잡기 시작하다가 억불하던 조선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의 절들이 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주 노악산 자락에 위치한 남장사는 선불교 초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산중선찰이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국사가 노악산 장백사(長柏寺=남장사)에서 선을 가르치니 배우려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선불교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남장사 경내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 영역과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 영역으로 크게 나눠진다. 경사지에  자연적으로 쌓은 두 영역은 서로 섞이지 않는 경치를 보여준다. 보광전이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보광전에서는 산아래 경치가 볼만하고 극락보전에서는 절을 빙 둘러싼 노악산의 풍치가 아름답다. 극락보전에는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벽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내부포벽에 ‘이백기경상천도(李白騎鯨上天圖)’인데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유가(儒家)의 그림으로 눈길을 끈다. 이백이 채석강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에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가 죽어서 고래를 타고 천상으로 갔다는 전설을 그린 그림이다. 전설은 고래이지만 산골에서 고래를 보지 못한 화공의 상상력의 한계가 그만 잉어를 그려 놓고 말았다.


    사찰에 이 그림이 그려진 연유는 사적기에도 나와 있지 않은데 아마도 숭유배불시대의 잔재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절의 주법당에 속하는 보광전 옆에 '교남강당 '이라는 건물이다.  ‘영남(嶺南)’을 가리키는 ‘교남(嶠南)’이라는 말은 주로 유가(儒家)에서 사용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상주지방의 유림들이 자주 남장사에 들어와 거들먹거리며 음풍농월(詩會)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극락보전안의 ‘이백기경상천도(李白騎鯨上天圖)’ 역시 그 흔적으로 보인다. 이백의 전설과 불교의 교리나 전설이나 설화, 어느것에서도 연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눈길을 끄는 또 다른 그림은 적송자(赤松子)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다. 적송자는 중국 선사시대 신농씨(神農氏)를 도와 비를 다스렸다는 신선이다. 각종 음식을 먹는 방법과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림에 그려진 적송자의 모습은 중국 벼슬아치의 복장이지만 전설이 전하는 적송자는 거지의 몰골이었다. 짚으로 짠 거적을 걸치고 가죽치마를 둘렀으며 행동은 천진하였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장량(張良)은 "인간사 버리고 적송자를 쫓아 살고싶다"며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룬 이들의 표상이었다. 그 외에도 신선들의 그림이 가득하며 외벽에도 중국의 고사와 관련된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 극에 달했을때 이 지방에서 권력깨나 잡았던 유학자들의 억지였던 듯 싶다. 중국의 풍습에 사대하던 당시 고루한 선비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찰은 사찰대로 살아 남기위해 수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남장사의 극락보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정신을 뺏기고 중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여 스스로 좁디 좁은 정신의 틀에서 갇혀 살다 멸망한 조선의 비극이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시대의 반영이다. 1000년 전의 문학은 1000년전 시대의 반영이다. 온고지신은 옛것을 오늘의 현실에 반영하라는 뜻일 것이다. 1000년전 중국의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보다는 그것에 빠져서 허우댄 조선의 한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었인가?

     


    남장사 여행 포스트 보기


    보물990/992호 남장사 철불좌상/후불목각탱 
    http://blog.daum.net/roadtour/3330600


    삼행시- 상대방(상주 남장사)
    http://blog.daum.net/roadtour/1628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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