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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악산 금산사 기행(3)
    여행기 2006. 4. 11. 21:14

    블로그앤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백업하는 글..


    모악산 금산사 기행(3) 
    2003-11-17 오후 10:25:07

     


    *** 스크롤의 압박으로 3회를 나누었는데 마지막입니다.***

     

     


    (금산사 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노송의 모습이 멋있다.)

     

     

     

    육각다층석탑이다.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노반지주(露盤之柱)이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팔각석등을 볼차례다.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문화재라 하겠다.

     

     


     

    당간지주는 예로부터 절에서 행사시에 깃발이나 탱화등을 걸어두던 곳으로
    절의 대표적인 장엄물이다.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석조연화대를 보자..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반디불이 여태껏 보아온 연화대중에서는 제일로 큰것이다.
    아름답기 까지하니 이를 일러 금상첨화라고 하던가.
    단지 위에 있어야할 주인이 없으니 다만 아수운 마음일뿐....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도전은 일명 부도밭이라고도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스님들의 공동묘지라고 하면 이해가 될런지...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동쪽 길을 300m 쯤 오르면 왼쪽 산 기슭에 부도전이 있다.
    이곳이 고려시대의 봉천원으로서 혜덕왕사의 비도 여기에 있다. 나지막한 돌 담 안에
    15기의 비와 부도가 `ㅁ`자형으로 늘어서 있는데, 이들 부도는 고려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금산사를 거쳐 간 고승들의 묘탑이다.


    정면 중앙 깊숙한 곳이 최근에 건조된 진표율사의 부도를 비롯하여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동편에는 비(碑) 2기와 부도 4기 등 6점의 석조물이 있고, 서편에는 석신(石身)은
    유실되고 비대와 가첨석만 남아 있는 비(碑) 1기와 부도 7기 등 8점이 석조물이 있어
    총 15점의 석조물이 독특한 양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는 오층석탑을 보아야 할 때이다.
    이사진을 찍는데 북쪽하늘에서 구름이 꼭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미륵전앞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
    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또 사천의 다솔사도 여기처럼 부처님의 진신을 모셨다해서 따로 조형물을 만들지 않고 있다.


     

     

     
    (제발 여행문화가 좀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국보문화제를 이모양으로 훼손을 시키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규 학교교육의 문제점이 심각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미륵전 앞에서 바같으로 바라본 풍경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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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조아  2003-11-17 오후 10:53:03   
    고려시대의 석등들이나 불상.. 그리고 탑들은 다들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걸 볼수 있쬬..
    토착 민간 사상과 결합되었다나 어쨌다나~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그거이 보이는거 같기도 합니다 
     
      badawa  2003-11-18 오후 8:52:23    
    잠좌님이 이렇게 똑똑할수가 다시봐야겠는걸요 난 맨날까불락거리는 소녀인줄만 알았는뎅...
    아무튼 절 사진만 보면 대략 가슴이 조용해지고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모악산도 내가찜.... 
     
      제로쿨  2003-11-18 오후 9:05:38    
    까불락..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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