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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상과 허상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5. 30. 08:42

    <수필>실상과 허상
                                         김대근


    실상은 실제 우리 눈을 통해 존재하는 것을 말함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허상은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실상과 허상은 하나의 개념이지 둘로 갈라질 수 없는 것이다. 실상도 없다면 허상 역시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상이란 실상을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나타난다는 신기루를 예로 들어보자. 멀리서는 분명 보이지만 가까이가면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 현상은 사실은 실제로 있는 어느곳의 반영이 아지랑이 같은 기체에 비쳐보인 것이다. 주변과 밀도가 달라진 공기층이 영화 스크린이나 거울의 면과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신기루로 나타나는 영상이 반드시 존재하는 지형지물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지형지물이 없다면 신기루 자체도 없다.


    과학적으로 실상과 허상의 개념적 차이를 알고자 한다면 착각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세상의 모든 것은 빛이 있기에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은 실제 빛이 모이는 지점들의 집합이고 허상은 빛이 모인다고 착각하는 지점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물체를 본다고 하는 것은 망막속으로 그 물체 고유 파장의 빛이 들어온 것을 말하는데 그 빛의 발광지점이 보이는 물체의 위치인 것이다. 허상은 실상에서 나온 빛의 근원적 위치를 오판하여 받아들인 결과인 것이다. 거울을 통해 사과를 본다고 하면 실상의 사과가 내는 빛의 위치를 거울속 평면의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홀로그램은 더 애매한 공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누구나 한장 이상씩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에 보면 홀로그램이 붙어 있는데 이것을 빛에 노출시키면서 적당하게 시선을 맞추면 빛을 의도된 방향으로 수없이 반사하는 집합공간임을 알 수 있다. 빛을 발사하는 근원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이 착각이 의도된 그림이나 문자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빛이 차단되면 실상도 허상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실상과 허상이 둘이 아니라는 과학적 사고는 불교적 사상인 불이(不二)적 사상과도 통한다. 불교에서 인간이 고통속을 끝없이 떠도는 것은 실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던지 절대적 진리인 실상을 자신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윤회의 고통속을 헤맨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허상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이고 진리를 깨달아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결국 실상을 보고 깨닫는 것을 말함이다. 허상을 허상이라고 바르게 보는 것이 곧 수행이고 수행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한 것이다.


    기독교 사상도 허상에 매몰되는 것을 극히 경계한다. 허상의 대표적 열매로 교만과 편견을 꼽기도 한다. 일본의 석학인 '우찌무라 간조'는 1884년에 지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담은 회심기중에서 미국인이 빠진 허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새로 장만한 비단 우산을 도둑맞았다. 미국이 기독교국가라고 하면서 소지품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기독교 국민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커다란 열쇠뭉치를 이제껏 나는 본 적이 없다. 집은 바깥 현관에서부터 집안의 반짓고리에 이르기까지 온통 자물쇠로 잠겨 있다.

    도둑의 영이 집안 구석구석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돌로 든든히 지은 지하실과 쇠로 만든 금고가 필요하고, 사나운 개와 경찰들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것이 과연 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기독교 나라에 만연해 있는 인종차별이다. 나는 남부에서 도시의 특정구역에는 흑인들이 들어 갈 수 없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와같은 인종차별은 비성경적이라고 미국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흑인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기독교를 포기하고 그들과 떨어져 살겠습니다."』


    우리집 아이들도 그렇다. 문만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자물쇠를 못 믿어서 중간에 있는 고리를 다시 채우고 자동열쇠의 LOCK 스위치를 올리고서야 안심을 한다. 우리집에 들어올 도둑은 실제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면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도둑은 실제하는 존재이지만 우리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들어올 도둑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존재일 뿐인 것이다. 존재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이란 일종의 허상이 아닐까? 그렇다고 문을 열어두고 산다고 할 수도 없으니 머리속의 허상도 실상으로 인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노곤한 삶의 단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며칠전에 광우병에 대한 소견 몇 가지를 적었는데 다분히 보수계열에 있는 선배 한 분이 댓글을 달았다. 요지는 인도를 걷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 있는 확률보다 광우병에 걸리게 될 확률이 적기에 요즈음 사회각층에서 보이는 민감도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위의 도둑의 문제처럼 지금 당장 존재하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우려가 허상으로 치부될 수 있는가 이다. 광우병은 원인이 분명한 실상이다. 동물성 사료를 먹이지 않으면 소의 몸에서 변형프리온이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광우병의 원인요소가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빛을 차단하면 사라지는 홀로그램의 허상처럼 원인을 차단하면 원인요소가 사라져 버림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돈의 문제로 귀착된다. 돈은 인간의 탐욕을 키우는 교만과 편견의 그릇이다. 자신의 탐욕을 살 찌우기 위해 힘없는 자를 핍박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사상에서 절대 배재되어야 할 사상만이 미국인들은 남겨서 자신을 옥 죄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를 사는 인류 모두가 장자의 '나비의 꿈', 그 속을 바쁘게 퍼드득 대면서 날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이! 김선생. 당신은 실상속의 허상이야? 허상속의 실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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