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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박 2일 봄꽃여행記 (두레문학 상반기호)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7. 15. 18:16

    1박 2일 봄꽃여행記

     

                                     김대근

     

     

    어제라는 아날로그적 시간의 저 너머에 남겨둔 흔적이 5시에 알람으로 되살아났다. 식구들의 곤한 아침잠을 깨우지 않으려 고양이 걸음으로 여장을 꾸리는데 아내가 피곤이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일어나 두유에 선식을 타 준다. 아침잠을 깨운 미안함을 감추려 바닥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용기를 기울여 마시고 문을 나선다. 지난밤에만 해도 덕지덕지 붙어있던 도시의 탁함이 사라진 새벽공기를 폐부에 가득히 채우며 여정의 첫 길을 디딘다.

     

     

    고속도로는 전장이다. 서로 앞만 보고 앞 다투어 달리는 치열한 전장……. 사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이들은 목적지를 또렷하게 각인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목적지가 없이 길을 가는 것보다 목적지가 정해진 여로(旅路)가 훨씬 피곤하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욕심을 만들고 사람을 채근하는 것이다. 게다가 밤 운전은 그 피로도가 몇 배 가중된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의 단순함이 정신을 무료하게 하고 반사 신경을 둔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길을 나서보면 치열한 전장에서 패배하여 흉칙한 잔해를 남긴 현장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화물차가 갓길에 주차한 또 다른 화물차를 들이 받는 사고로 오도 가도 못한 채 차와 차 사이에 끼어 있은 지 거의 2시간여 만에 풀려나 대구-포항고속도로의 영천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11시다. 오늘은 계획보다 2시간이나 늦어버린 셈이다. 자투리 시간을 만들어 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배속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식충(食蟲)들이 배고프다는 신호를 자꾸 보내온다. 그나마 이들이 있어서 하루 세끼는 챙겨 먹는데 오늘은 아침 겸 점심으로 한 끼를 줄이게 생겼다. 자투리 시간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한 끼를 벌었으니 본전은 한 셈이다.

     

    시간을 가늠하니 30분쯤 여유가 있다. 포항까지 아직 남은 거리가 있지만 국도로 길을 갈아 탔다. 휴게소에서 넘겨다본 산야에 분홍빛 복사꽃이 살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장소로 가면서 동시에 눈과 마음을 채우는 일이니 덤 하나를 얻는 셈이다. 배 밭들에도 배꽃이 흐드러졌다. 배나무들은 농부들에 의해 키가 자라지 못하도록 구속된다. 하늘로 마음껏 자라지 못하는 배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배의 속살 같은 배꽃이 피었다. 과일의 꽃을 보면 배꽃은 배의 속살을, 사과 꽃은 사과의 속살을, 복사꽃은 복숭아의 속살을 제가끔 닮아 있다. 중간에서 다시 국도마저 버리고 산을 넘는 지방도로를 택했다. 산길을 따라 복사꽃들이 피어서 마음까지 분홍빛으로 물이 드는 것인지 미열을 느낀다. 봄은 가끔씩 기분 좋은 미열을 안겨주기도 한다. 농부들이 늘 솎아내는 탓인지 복사꽃은 촘촘히 피지 않는다. 그래서 뒤 배경이 감추어지는 게 아니라 잘 드러나는 것이다. 화려하고 빽빽하게 피어 세상을 다 가리어 버리는 벚꽃과는 달리 복사꽃은 화려하게 피었다 제풀에 우루루~ 져버리는 벚꽃과 달리 제 몸들 사이로 하늘도 통과시키고 풀 색깔도 통과 시킬 만큼 여유가 있다. 복사꽃은 벚꽃처럼 오로지 자기만 보아달라고 보채지 않아서 좋은 꽃이다.

     

      

     

    복사꽃 피면

     

    하얀 배꽃은 달 뜬 시린 밤

    멍든 가슴 녹여내겠고

    흐드러진 복사꽃

    자꾸 추억을 들추며

    진종일 따라붙다가

    해 질 녘 하늘에 옮아

    붉은빛 물이 들면

    섧지도 않은데

    짜르르 눈물 나겠다

     

     

     

    회사원에게 있어서 회의는 일종의 전투와 같이 엄숙하고 치열하다. 회의라는 것이 서로 회사 이익을 위한 다툼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전술도 있어야 하고 전략도 있어야 하는 게 회의다. 내가 상대에게 밀리면 곧바로 회사의 손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치게 되면 돌아가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고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그 공과를 저울질해 받기도 한다. 삼국지에서 장수들이 양측의 수많은 군병들 앞에서 일대일로 싸우는 것처럼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회의장에는 늘 감돈다. 이런 회의를 2시간만 해도 5시간 동안 운전을 했을 때보다  훨씬 피곤함을 느낀다. 오늘은 이런 회의를 3건이나 했다.

     

    겨우 일정에서 풀려난 시간은 오후5시…. 사우나 생각이 간절했지만 아침에 마련하지 못한 자투리 시간 탓에 무리를 하기로 했다. 나는 차를 달려 간곳은 경주다. 경주는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 게 탈이다. 계절적으로 지금쯤이면 경주는 벚꽃으로 온 동네마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었을 것이다. 유채꽃도 덤으로 얻는 분황사도 좋을 것이고 한적하게 벚꽃구경을 할 수 있는 김유신 장군묘로 올라가는 길도 좋을 것이다. 서출지에 몇 그루의 벚나무가 피워내는 수채화 한 폭이 물에 비치는 모양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안압지의 밤 풍경은 벌써 몇 번의 걸음에도 그때마다 간이 오그라질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에는 有限이라는 단어가 지배하고 있음을 어쩌랴……

     

     

    포항에서 경주까지의 30분 동안에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에는 보문단지로 목적지를 정했다. 가을이 좋은 곳은 가을에 가리라…. 어디는 여름이 좋으니 그때에 가리라….

    그래서 차 떼고 포 떼니 남은 곳이 보문단지이다. 보문단지에서 잠깐 걸었던 30여분 동안 비를 흠뻑 맞았다. 촘촘하게 머리와 어깨…, 그리고 온몸을 두드리며 내리듯 흩날리는 꽃비를……

     

     

     

    꽃비

     

    비가 내렸다

    어둑사리 내리는 저녁

    풍덩 풍덩 소리도 내지 않고

    머리 어깨 가슴에

    빗금 치는 바람에 묻어

    그렇게 비가 내렸다

    향기에 눌려져 얇게 저며진

    하얀 빗방울 나풀거리며

    허공에 회오리의 길, 멀찍한 길을 만들며

    내리고 쌓여서

    길가는 나그네 발목을 채우는

    은빛 족쇄가 된다

    탈색지대 같은 그늘에 서면

    벚나무는 옹이를 열어 말 한다

    오고 가는 뜻 나에게 묻지 말고

    꽃비나 맞고 가라고……

     

     

     

    같은 날…. 밤 7시에 나는 안동에 도착을 했다. 포항에서 남으로 갔다가 다시 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수리로 따진다면 분명 손해를 제법 본 것이기는 하지만 스쳐가는 순간들은 모두 과거가 되니 한 조각이라도 더 마음에 끌어안는 것도 좋으리라 싶다. 아직 비움의 공부가 미진한 탓이리라. 안동은 산골의 동네에서 호반의 도시로 탈바꿈을 하였다. 도시전체가 마치 바다로 둘러 쌓인 섬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것을 일러 옛 사람들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하던가……

     

    이미 어둑사리가 내리는 시간이라 월영교月映橋에 들렀다. 거창한 역사적 가치를 자랑하거나 문화적 품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최근에 새롭게 만든 나무다리다. 그러나 이 다리 부근에 있었던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몇 백 년 세월의 이끼를 걷어내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몰된 곳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었다. 수몰 전에 발굴 작업을 했는데 그 무덤에서는 미투리 한 켤레와 완이아버지에게…로 시작되는 편지 한 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 사연은 이렇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가 병이 들어서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뱃속에 새롭게 자리를 튼 새 생명을 두고 그렇게 혼자서 먼저 길을 떠나버린 것이다. 예전 여인들은 아침마다 머리를 빗으며 머리카락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고 한다. 왕가나 양반가의 여인들은 가채를 머리에 올렸고 인조모가 없었던 시기라 당연히 머리카락은 마치 하나의 재산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아내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남편이 저승으로 신고 갈 미투리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남편에게 써넣은 편지에는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연이 적혔었단다. 커플끼리 손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너며 사랑을 맹세하면 사랑을 이루고 평생해로 한다는 소문이 퍼진 후로 수많은 커플들이 찾는다고 한다. 일찍 이별한 애달픈 사연을 밟고 백년해로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인공다리에 가미된 또 하나의 허상은 아닐까 싶다.

     

     

     

    안동 월영교 사연

     

    불도저 기사가 산을 깎다가

    이무기 대신 주운 게 있었다네요

    아이들 소풍날 비 올 걱정 없다며

    주운 미투리는 머리카락 엮은 것이라네요

    미투리 곱게 싼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네요

     

    "완이 아버지

    어찌 혼자 길을 간게오

    하도 섧게 우니

    완이가 툭툭 배를 차며

    아베 신발 없다는 게오

    밤낮 참빗질로

    저승길 표나지 않게 검은 것 골라

    미투리 삼으니 너무 차가워

    밤새 당신인 듯 젖가슴에 덥혔으니

    저승 가는 길 따스이 가오"

     

    물길 건너는 나무다리 월영교를

    자박자박 걸으며 맹세를 하면

    사랑의 맹세가 굳어진다는데요

    너무 굳어져

    가끔 깨지는 것도 있다 캅디더

     

     

     

    따지고 보면 너무 짧고 허무한 것이 인생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조금만 눈을 감아도 십리나 달아나 버린다. 월영교에서 나와 간단한 저녁을 먹고 나니 8시쯤이다. 저녁형 인간으로 분류되는 나에게는 아직 초저녁인 터이니 조금이라도 더 가는 것이 다음날 일정에 도움이 되겠다 싶다. 그래서 다시금 길을 잡아서 도착한 곳이 예천이다. 이미 시계는 10시를 넘고 있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곳에 도착을 한 셈이다. 숨 가쁘게 움직였던 하루의 피로가 젖산으로 변해 온 몸을 돌아 다녔다. 예천군 읍내는 십리정도 남았는데 국도변에 세워진 여관 간판에 새롭게 생성된 젖산들이 손가락 끝에 까지 아릿하게 몰린다. 여행길에서는 종종 강한 유혹을 느끼게 하는 것이 휘황한 불빛들이기도 하다. 혼자 있다는 것이 사람을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지만 번번이 일탈의 일보직전에서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처럼 온 몸에 젖산이 풍부해진 때에는 그저 일찍 숙면에 드는 게 최상이라 싶다. 변두리도 조용하겠다 싶어 간판을 따라 길을 잡고 보니 곧바로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서야 2층짜리 낡은 모텔 건물이 보인다. 조금 후회가 되기는 했지만  "e-편한모텔"이라는 간판이 기대심리를 한껏 부추겼다.

     

    "e-"라는 소문자 알파벳을 간판으로 사용하는 대개의 업소들은 인터넷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행이다. 급한 이메일처리는 가능 하겠다 생각하며 인터넷이 가능한 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되돌아온 말은 "이곳은 시골이라~~"였다. 방에는 아직도 저런 텔레비전이 있었나 싶게 오래된 모델이다. 텔레비전의 모델이 별건가, 방송만 잘 나오면 되는 것이지 하고 전원을 켜고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3개가 한계인 것이다. 인터폰으로 물으니 주인은 또 "이곳은 시골이라~~"는 말만 던진다. 유선은 없고 그저 정규방송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도 맥주는 있다고 해서 맥주 2병과 땅콩을 주문했더니 배달 왔다가 가면서 던지는 말…. "손님~ 비디오 틀어 드릴까예?" 혼자서 쓸쓸히 여관에 들어와 혼자서 맥주나 홀짝거리는 나그네가 보기에도 애처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싸구려 시골여관

     

    읍내에는 근사한 모텔도 있음 직 한데

    몸속으로 젖어든 소금기가 무거워

    그냥 가지 친 외길 따라

    쪽방촌 골목 같은 그 길 끝

    낡은 2층짜리 여관에 들었다

    나처럼 'e-편한'이라는 단어의 달콤함에

    촉수를 늘이고 들어왔는지

    주차장을 절반이나 채웠다

    이만 오천 원… 싸구려 여관

    인터넷 대신 카운트에서 야시시한

    비디오를 틀어 주겠단 말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생각나

    혼자 웃고 말았다

    절여진 몸을 씻을까 하다가

    낡은 방에 낡은 나그네가 되기로 했다

     

     

    토요일이다. 으fp 토요일은 길이 막힐 것이고 그만큼 길에서 실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길에서 허무하게 보내는 시간은 나그네에게 치명적인 독이다. 부실한 잠자리 탓에 온몸이 찌뿌드드하다. 잠에서 일찍 깨어나 서성거리는 정신을 챙겨 예천온천에 들렀다. 지하 800미터까지 파 내려가 개발을 했다는 예천온천은 그런대로 물이 좋았다. 예전에는 100자, 즉 30미터쯤이 한계였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제한이 없다. 어디든 파기만 하면 온천이 쏟아지는 시대인 것이다. 허리가 거의 90도로 꺾어진 할머니가 만드는 순두부로 아침을 해결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것으로 하나 밖에 없다는 윤장대라는 보물을 간직한 용문사에 들렀다. 윤장대는 경전을 넣어 두는 곳으로 삼월 삼짇날 윤장대를 돌리면 자신이 지은 업을 덜 수 있단다. 사실 자신이 지은 업을 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그러려니 자신을 위안할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여든다. 업을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쉽게 지은 업을 감할 수 있다는데 유혹을 느끼지 않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용문사에는 업경대(業鏡臺)라는 거울 모양의 목 조각품이 있는데 말 그대로 자신이 지은 업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이 업경대에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듯 자신이 지은 업이 비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 생각의 소산인가. 증거에 의해서만 범인으로 단정된다는 현대의 법정신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길을 문경으로 잡고 가는데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옆에는 소나무들 가랑이 사이로 피어있는 진달래 빛깔이 매우 좋아서 한 곁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보지만 무심하다……

    길손이 보내는 애절한 눈빛에는 아랑곳이 없이 햇살 받기에만 여념이 없다.

     

     

     

     

    진달래, 불을 지피다

     

    4월의 봄날 길 나들이는 추워서

    어린 날 손을 녹여주던

    사랑방 화로가 그리웠다

    응달 많은 산골 마을 시골길

    그늘마다 마음 시려

    자꾸 서둘러지는데

    산등성 화로같이 생긴 마을

    햇살 모둠 지에 피워지는

    분홍빛 화톳불, 소름 돋아 섰는 소나무

    밑동을 달구어 대면

    새파랗게 질리는 우듬지

    후두두 바르르 떨어댄다

     

     

    *우듬지: 나무의 꼭대기 줄기

     

     

     

    문경 땅이다. 문경은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의 관문이다. 서울 이남에서는 가장 또렷하게 철벽같은 곳이어서 남쪽으로 서울을 지키는 관문 같은 곳이다. 과거가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었던 옛 선비들은 떨어진다는 의미의 추풍령을 피하여 문경새제를 넘었다. 먼 삼국시대에는 이 땅을 차지하고자 흘린 피가 유난했다. 그만큼 전략적 가치가 있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문경을 등에 지고 싸움에 임했더라면 전쟁은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매듭지어 졌을 것이라는 것이 현대 전술가들의 말이다. 때로는 한나라의 운명을 가늠하기도 했던 곳이다.

     

     

    사불산 대승사에 들렀다. 대승사는 사불산의 중턱에 있다. 사불산의 정상에는 산의 이름이 유래되고 대승사를 있게 한 바위가 있다. 대승사의 암자인 윤필암에는 통도사 법당처럼 불상을 모시지 않는 사불전이 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처럼 유리를 터서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법당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아리니 사불산 정상에 우뚝 솟은 바위가 하나 보인다. 마치 불상 같은 모습이다. 그렇구나….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다. 예천온천에서 2,000원이나 주고 닦은 구두가 반질거리며 만류의 표정이지만 1시간을 넘게 허덕이며 산을 올랐다. 그냥 지나쳐 버렸다가는 나중에 큰 후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떠돌다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책이나 방송을 통해 겉만 보고 온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허전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사불산 정상에는 코도 눈도 입술도 모두 바람에 주어 버린 불상이 사면으로 새겨진 바위가 있다. 윤필암에서 볼 때는 하나의 불상과 같다고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사방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석질이 단단하지 못한 탓인지 풍화가 심하여 부처의 모습을 아슴하게 남겨놓았다. 어쩌면 내가 잡고 있는 부처의 모습도 저러하리라. 산위는 진달래도 더디 피는 모양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중턱을 지나니 4월의 중순에도 정상에는 이제 꽃봉오리를 겨우 맺고 있다. 아랫동네에서 두견이 우는 소리가 파동의 여울 하나를 만들며 들려온다. 봄소식은 아마도 산 밑 마을에서부터 시작되는 모양이다.

     

     

     

    사불산의 봄

     

     

    문경 땅 사불산四佛山 정상에

    진달래 늦게 피는 이유

    나는 알지, 그 사연

    봄바람 나 마실간

    두견이 때문이지

    사하촌寺下村 두견이 구구구 울 때마다

    몽실몽실 가슴이 가려운 진달래 봉오리들

    목 빠지게 넘겨 보지만

    코도 눈도 뭉그러진 채

    사리 빠진 자리마다 흉터 생긴 돌부처가

    자꾸 눈앞 가려 졸이는 마음

    길 잃은 벌 한 마리 마침 지나다

    내일이면 오겠지, 두견이 말이오

     

     

     

    벌써 2년도너머 흘렀다. 월악산의 미륵이 뵙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 꼭 들러보리라 다짐하고 돌아오는 길을 돌고 돌아 안동과  예천을 거쳐 문경으로 해서 월악으로 잡기는 했는데 사불산에서 제법 지체가 되었다. 문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식구들과 약속해둔 토요일 외식은 이미 물 건너 가버렸다. 월악산을 등에 이고 서있는 월악산 미륵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다. 몸통은 온통 이끼를 머금어 천년의 낡음을 나투어도 얼굴은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같이 뽀얗다. 게다가 미소는 또 얼마나 천진한지……

     

    손을 꼽아보니 이상하게도 봄에 월악산 미륵을 뵌 적이 없는 것이다. 눈이 내린 겨울이거나 신록이 뒤 덮힌 여름이거나 낙엽들이 파도처럼 밀려다니는 가을이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속에서 웃으시는 월악 미륵님을 뵙고 싶었지만 이미 해는 서산을 넘고 나그네의 걸음도 천근이어서 마음의 잡책에 숙제 하나로 남겨 두기로 한다.

     

     

     

     

    월악산 미륵님

     

     

    목욕하는 걸 싫어하는 막내와

    기어이 씻기려는 아내의 다툼을 보다가

    월악산 미륵이 생각났다

    처처불상處處佛像 이라더니

    얼굴만 씻으면 깨끗하다는 내 딸이

    월악산 미륵일 줄 몰랐다

    여장을 챙기고 집을 나서며

    미륵님께 천 원짜리 지폐 석 장 공양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날자 변경선이 막 지났다. 오랜만에 외식을 기대했던 식구들의 날선 시선을 받으며 현관을 들어서니 꼭 죄인이 된 기분이다. 포항에서 사온 해맞이 빵 한상자로 옹색한 방패박이를 해본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 1박3일간의 여로를 더듬으니 새로 웃음이 났다. 문득 아내의 샤워소리에 놀라 얼른 잠을 청했다.

     

    (반년간 두레문학 2008년 상반기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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