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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김대근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6. 24. 10:49
마누라
김대근
나는 '마누라'라는 말을 잘 쓴다. 실제로 쓴다기 보다는 글에서 자주 적는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학동호회 카페에 짧은 수필 하나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마누라'라는 낱말이 두 어 개 들어갔다. 문단의 중진급인 수필가 한 분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마누라는 비속어이므로 '아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알겠다고 하고 관심에 감사를 표했지만 마음 한 곁이 찝찝한 것은 사실이다.
'마누라'의 대칭어는 '영감'이다. 그런데 이 영감이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슬아치에게 헌정하는 최고의 극존칭이었다. 20대 초반의 검사나 판사에게도 붙일 정도로 상대를 높여주는 존칭의 하나였음을 누구나 알 것이다. 지금은 둘 다 모두 비속어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마누라'와 '영감'은 엄연히 계급적 차이가 있었던 호칭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의 호칭 중에 가장 많이 쓰인 말이 중국에서 들어온 '마마'라는 말이었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동궁마마'와 같이 통 털어서 쓰이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별히 공주나 옹주에 대해서는 '자게마마'라고 한다. 그 중에 '마노라'라는 말은 주로 빈궁에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여자에게 쓰이는 극존칭이라는 말이다. 빈궁이란 왕후와 미래의 왕후인 세자빈 밖에 없으므로 최고 지위의 여자에게 헌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는『계축일기』와 『한중록』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오면서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이 말은 시중으로 나와 '마누라'로 변해 '노비가 상전을 부르는 칭호'로, 또는 아내를 높여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점 격이 낮아지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가끔 사극을 보면 정승에게도 '영감'라는 말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영감이라는 칭호는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2품 이상의 관원에게는 특별히 '대감'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목사, 부사, 관찰사등이 이 품계에 해당하여 '영감'이라는 칭호로 불리웠는데 이 전통이 최근까지 남아서 판사, 검사에게 붙이는 용어가 되었다. 이 용어 역시 지금은 다른 용도인 늙은 남자의 뜻으로 사용된다. 늙었다는 것이 비속에 속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낮추는듯 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아름다운 우리말들 중에 이렇게 비속어의 내리막길을 걷는 낱말이 많다. 한자를 어원으로 하는 낱말이라야 고급스럽게 쳐준다. 유교에 의한 한문지상주의가 500년을 지배한 탓도 클 것이다. 말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중국을 향해 있던 자침이 미국을 향한지 50여년, 우리 말 속에 녹아들고 스며든 수많은 영어 낱말들이 있다. 와이프, 테이블, 소파… 등등 셀 수 없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내'보다 '와이프'가 더 고급어이다. 문화지향점이 바뀐 탓이다.
나는 ‘와이프’라는 말도 글에서 잘 쓴다. 이 말 또한 선배문인으로부터 ‘아내’로 고쳐 적을 것을 권유받고 가능한 안 쓰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와이프’라는 낱말을 ‘아내’로 대체하고 난 이후 내 글을 읽는 카페의 젊은 독자는 글이 딱딱해 졌다는 것이다.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아내’라는 말보다 ‘와이프’라는 말이 더 밀착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물을 독자라고 하면 독자와 유리되지만 고고해 보이는 기름진 글 보다는 독자의 마음으로 흔적도 없이 섞이고 마는 글을 쓰고 싶은 나에게는 이런 말들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내를 부를 때나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의 호칭도 마뜩찮은 게 사실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를 부를 때는 내 이름을 부른다. 나 역시 ‘여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서 큰 아이 이름으로 아내를 부르곤 했다. 가끔은 큰 아이와 아내가 동시에 대답하는 혼란이 있기도 했는데 오십이 되면서 호칭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겠다싶어 어느 날 “마누라! 나 좀 보소” 했더니 담박 “왜 그러오, 영감!”이라는 대칭어로 돌아왔다.
망할 놈의 마누라 같으니… 왕후에게 바친 칭호를 헌상했는데 겨우 종이품 이하에게 붙는 걸로 부르다니… 이런 것을 두고 본전도 못 찾았다고 하는가. 하기는 김家성을 가진 식구들 중에서는 이家성을 가진 마누라가 제일 높다. 요즈음 가장이란 권한은 쥐뿔도 없고 그저 책임만 등짝에 매달고 사는 불쌍한 족속을 이르는 말이다. 칭호의 차이가 날 만하다.
아홉시 정각이면 들려주는 뉴스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대통령의 마누라께서……" 같은 말을 듣고 싶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은 말도 있는 것은 물론이다. 마누라가 뜬금없이 "영감~~"하고 부르는 말은 아직 듣고 싶지 않다. 이 부조화를 어찌해야 하는가.'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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