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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넘겨진 페이지의 활자 /김대근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10. 18. 14:07
넘겨진 페이지의 활자
김대근사람에게 있어서 나이란 무었일까.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세월의 흐름을 계량화한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부터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나이의 철학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생물학적 정의는 곤충이 유충의 시기에 탈피를 계속하며 생장하는 각각의 기간을 말하고 의학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노화 단위를 구분하여 나눈 것이다.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나이의 개념은 아득하고 먼 것일 것이고 노인이 생각하는 나이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쳐 코 앞에 천장단애의 절벽을 만난것과 같을 것이다. 어쨋던 나이라는 정의내리기 어정쩡한 이것이 흔적을 남기는 곳이 우리들의 육신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여기저기 피부에 골을 파고 뼈에 공간을 넓히며 모공으로 멜라닌을 증발시켜 터럭을 탈색시킨다. 제 아무리 잘나고 머리가 좋고 돈이 많아도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옷이나 장신구같은 것들이 커버하는 5년과 타고 나거나 관리를 잘해서 젊어 보이는 5년을 합하면 개인차는 겨우 10년이다. 100년도 못사는 우리들의 개념으로 보면 10년도 아주 큰 차이다. 그러나 그것도 30대에서 50대에서 두드러져 보일 뿐이고 60을 넘어서고 보면 개인차는 뚜렸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계층의 개인차가 심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꾸미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청결을 유지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제는 늙었으니까 하고 자신을 가꾸는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며칠 동안 몸 매무새를 돌보지 않아도 또래에서의 편차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그 차이가 너무 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국 나이가 들어갈 수록 포장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노인이라는 경계는 어디쯤일까? 예전에는 열악한 의료기술에다 공중보건이 전무했으므로 평균수명이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서른만 넘기면 장년에 마흔을 넘기면 노인으로 취급되었다. 60이 되어 회갑을 하게되면 지방의 수령이 회갑잔치에 참석할 만큼 오래 살았다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성인으로 동양에서는 제법 이름을 위맹하게 떨친 꽁쯔(孔子)의 말씀이 수록된 《논어》위정(爲政)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자왈(子曰)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다. 그 중에서 50세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늘의 뜻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먹는 것을 셈하고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살아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서른이고 마흔이 넘고 오십에 닿았다 싶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오십을 넘어 책장의 뒷편으로 위치가 바뀌어졌다.
펼쳐진 페이지의 활자와 넘겨진 페이지의 활자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이다. 남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적인 공허가 더욱 크다. 이럴때 누군가가 늙었다거나 노인이라거나 하면 울고싶은데 뺨을 맞는 격이다.
서울 갈 일이 생겨 철도청 사이트에 접속해서 표를 사고 티켓까지 프린트를 하고 접속을 끊어려다 문득 등산화를 무료로 준다는 이벤트 코너가 발목을 잡았다. 일잔 클릭을 하니 대부분의 사이트들이 고객 정보수집을 하듯 주민등록번호며 주소 따위를 자세히 묻는다. 등산화가 눈앞에 가물거려 묻는대로 성실하게 입력하고 확인 단추를 클릭하는 순간 넘겨진 페이지의 활자처럼 먹먹해진다.
"25세~47세까지 응모가 가능합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할 때 걸러주었으면 있는 정보 없는 정보까지 모든 밑천을 내놓지 않아도 되고 애써 독수리 타법으로 입력을 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욕을 있는대로 퍼 부으며 메인화면으로 돌아가 다시 보니 이벤트 응모 코너하단에 배경색가 비슷하게 흐린 글씨로 "25세~47세까지 응모가 가능합니다." 쓰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헤프닝은 내 탓으로 돌아온 셈이다. 요즘들어 부쩍 잔글씨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촛점 렌즈도 한계라는게 있는 모양이다. 나는 오늘의 헤프닝을 심해지는 노안에다 덤태기를 씌우고 만다.
잠시후 다시 인터넷에 접속해 옥션사이트에 저번에 보아두었던 명함사이즈의 얇디 얇은 프린넬렌즈라는 돋보기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지키던 자존심의 선 하나가 주르르 무너진 날이다.'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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