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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言)의 수난記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3. 18. 17:23

    말(言)의 수난記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경상도 사나이가 군대를 가서 전방에 배치되었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서울 출신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뭔가 앞에서 바스락 거리는 것이 아닌가. 긴장한 초병은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에 손을 걸고 깜깜한 앞을 보며 외쳤다.


    “설탕”
    “사분”
    “……”


      오늘 암호는 분명히 이쪽에서 “설탕”하면 저쪽에서 “비누”하고 답해야 하는 것인데 ‘사분’이라니 이건 분명히 적군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암호를 확인했다.


    “설탕”
    “사분”


      초병은 어둠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바로 들려온 소리 “으으윽~ 빙신… 비누나 사분이나… ”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투리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할 때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산을 떠나지 못했다. 당연히 경상도 사투리와 거센 억양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당연하던 것이 어느 때부터 수난을 당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던 기억의 몇 가지를 펼쳐보고자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다. 자주 배가 아팠는데 어른들은 “거시”, 즉 회충으로 인한 배앓이가 자주 있었다. 당시는 거의 대부분의 야채들이 인분을 거름으로 키워졌고 이것을 먹는 사람들은 회충에 감염이 쉽게 되었다. 한번은 동생이 많이 아팠는데 엄마는 시장통에 있는 약국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약국에는 젊은 여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근엄하게 생긴 안경을 쓴 채 나를 맞았다. “동생이 거시배가 아파서…”, “어디가 아프다고?”, “저기 동생이요… 지금 거시배가 아파서요”, “거시배가 뭐니?”


      결국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한참을 걸어서 할아버지 약사가 운영하는 조그만 약국에서 약을 사왔다. 물론 속도 모르는 엄마는 놀다가 왔다며 호된 꾸중을 내렸다. “약사가 내 말을 못 알아들어가… ”, “와? 약사가 귀머거리드나? 어데서 놀고 와가지고……”


      두 번째 수난은 서울에서였다.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새벽 짐을 챙겨서 무단가출을 했다. 비둘기호는 밤 10시가 되어서 서울역에 나를 뱉어 냈다. 무단가출답게 서울역에 내려 셈해본 결과는 하룻밤을 자기에도 부족했다. 은근한 후회가 밀려왔지만 내려갈 차비도 없는 판이니 어찌되었던 서울에 빌붙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울역 앞에는 전봇대와 게시판을 꽉 채운 것들이 『숙식제공, 월수최고, OO주점 웨이트』 같은 문구들이 인쇄된 종이들이었다. 그래도 이런 일을 하려고 서울 온 것은 아닌데 싶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다 『냉동기술학원, 기숙사유, 주간 아르바이트 보장』이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이것이다 싶어 공중전화를 했더니 당장 찾아오라고 한다. 수업료나 기숙사비등은 나중에 내도된다는 것이었다.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탔다. “제기동… 제기동…”을 외우며 메모한 내용의 버스와 번호가 같은지 확인한 다음 버스에 올랐고 차장 아가씨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주었다. 사실은 호주머니에 잔돈도 있기는 했지만 버스비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을 해보지 않았기에 천원을 주면 으레 잔돈을 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1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라 피곤에 젖은 차장은 잊어버렸는지 잔돈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몇 번 입술을 달막거리다가 아직 몇 정거장 남아있으니 주겠거니 했다. 그렇지만 겨우 3정거장을 남겨 놓고도 도무지 잔돈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꾸벅대며 졸고 있으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리 주소!”
    “……”
    “주리 달라 안 카요”
    “……”


      졸다가 잠이 깬 차장의 눈이 커졌다. 뿐만 아니라 차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 몸의 여기저기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원래 당황하면 생각나던 말도 생각이 안 나는 법이다. 잔돈쯤을 모를 리 없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아차! 여기는 서울이지. 경상도 말을 쓰니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야. 다시 한 정거장을 남기고 심호흡을 가다듬고 서울말을 쓰기로 했다.


    “주리 주세요”


      야속하게도 내가 내릴 때 까지 차장은 내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피 같은 돈은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버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차장의 눈동자만 남겨두고 그렇게 떠나갔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셋이나 되는데 10년 전에 포항에서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왔다. 아이들은 말에 대한 적응력이 빠른지 6개월 만에 완전히 충청도 말을 습득했다. 집에서 아내와 주고받는 경상도 말에 “아빠, 엄마! 사투리 좀 쓰지 마세요”라며 타박이 보통이 아니다. 특히 선박을 고정시키는 “닻“과 ”�“의 발음이 도무지 안 되는 것이어서 놀림감이 되고는 한다. 게다가 여기저기 발을 걸친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쌀“과 ”살“의 발음이 혼동되어 간간히 회의장을 폭소의 도가니로 만들기도 한다. 아예 ”쌀~ 해봐유… 쌀~“ 하며 놀리기도 한다.


      며 칠 전에는 지인의 모친상이 있었다. 같이 상가를 방문하기로 한 지인들이 늦게 약속을 하는 터에다 집하고 장례식장이 가까워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갔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차려진 상을 받았다. 요즈음은 대부분의 문상이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는데 옛날의 상가처럼 마당에 솥을 걸고 고깃국을 끓이던 풍경은 이미 과거의 사진첩 속으로 숨어 버렸다. 일회용 용기에 일회용 수저로 한 그릇 먹고 나오는 게 고작이다. 마당가에 천막이 쳐지고 멍석위에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서 화투를 치면서 망자를 위해 밤을 새워주던 풍습은 남의 나라 풍습인 듯 이미 낯설어 진지 오래다. 네 명이 앉게 되어있는 상에 일행 세 명이 앉았다. 반찬은 미리 차려져 있고 국과 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우선 두 사람 분이 먼저 나왔다. 나는 이미 집에서 저녁을 챙겨먹은 터라 내 것은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야 했다.


    “놔 두세요”
    “……”
      일행도 밥을 나르던 사람도 다 같이 동시에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다. 아차! 또 경상도 사투리가 나왔구나 싶어 다시 말했다.


    “놔 두시라구요”
    “……”
      그래도 알아듣지 못한다. 앞에 앉은 일행 두 사람도 뭔 말인가 하는 눈빛이다. 오늘도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구나 싶다. 한 시간으로 느껴진  몇 초 뒤에 겨우 다시 짜 맞추어 내뱉은 말에 같이 간 일행은 폭소를 터트렸다.


    “취소요… 밥은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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