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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된 아이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8. 3. 12. 19:27
여자가 된 아이
작년 겨울 방학은 막내에게나 나에게나 특별했다. 이제 아이는 어린이로서는 마지막 방학을 보낸 셈이고 나는 이제 어린이날 선물 걱정에서 해방된 것이다. 추첨을 해서 정해지는 학교 배정에서 원하는 학교가 배정되지 않아 많이 속상해 하던 아이는 베란다에 화분을 보살피며 달랬다. 언니들과의 나이 차이로 집에서는 늘 어린아이로만 취급 받는 편이라 스트레스 일 것 인데 아이는 친구들과 곧잘 어울려 대인관계에서는 모가 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구들과의 대인 관계는 큰 아이가 제일 모가 나는 듯 하고 둘째가 가장 원만하다. 막내는 가운데쯤인 이다. 아마도 둘째는 장녀와 막내의 사이에서 귀여움을 받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자란 탓인지 그런 방면으로 적응이 빨리 되어 버린 듯 하다.
막내아이는 감성이 남다른 것인지 사물에 대한 의인화를 잘 한다. 가령 출장 길에 사다 준 봉제인형에게 선미라는 그럴 듯 한 이름을 붙여주고는 5년째 곁에 두고 있다. 바쁜 아침에 언니들이 후다닥 거리다 밟을라 치면 정말 생명체에게 하듯이 질겁을 한다. 혹 집착증인가 싶기도 하고 세대가 다른 자매의 막내로써 사랑이 부족한 가 싶어서 농 삼아 “동생을 하나 더 만들어 줄까?” 하면 막내는 자신만이면 된다며 극구 거부한다. 그러나 막내의 장점은 역시 흡인력이다. 세자매가 얼려 노는 것을 가만히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 막내 위주로 판이 짜여 지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막내가 가장 겁을 내는 것은 장녀인데 큰 언니가 시키는 일에는 꼼짝도 못한다. 반대로 그 말은 아버지로서의 말빨이 잘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인데 심리학을 전공하려는 둘째는 그것을 막내만 애틋이 사랑하는 증거로 막내의 모든 것은 용서의 대상이라는 편향적 사고라는 것이다.주 5일 근무가 시행되면서 토요일은 노곤하다. 종일 서서 일하는 아내는 육체적으로 한계에 이르는 금요일 뒤의 꿀맛 같은 휴식이고 정신적으로 한계에 이른 나는 토요일에는 꼼짝하기도 싫어진다.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몸이 주5일 근무에 제대로 적응한 탓이리라. 어느 토요일,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가고 침대에서 지친 육신을 뭉개고 있는데 베란다에서 빨래를 늘던 아내가 와보라고 한다. 무언가 고장이 났거니 하고 아침햇살이 아직 덜 빠진 베란다로 갔다. 아내의 시선이 흘러가다 멈춘 곳은 행운목 화분이다. 막내 아이가 매일 휴지에 물을 적셔서 잎을 닦아 주며 정성을 쏟던 행운목의 여린 가지 하나에 밴드 하나가 감겨져 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아이……
아마도 아이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몇 번도 미안해 하며 부러진 가지에 밴드를 발랐을 것이다. 그 풍경을 상상해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내는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한마디 던진다. “당신 닮은 딸이 있어 좋겠어요.” 나는 속으로 아이의 가슴속에 오래 감성의 샘이 마르지 않기를 빌어본다.
키마저도 나를 닮았음인지 제 언니들의 고맘때보다 좀 적은 듯 하다. 나는 고등학교까지 교탁에서 3자리 뒤로 가본적이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좀 사라지려니 했더니 딸들이 늘 하는 말로 남자 키가 최소한 180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사춘기에 내가 가슴으로 품었던 이상형이 주로 플레이보이 같은 외국 잡지에 나오는 늘씬한 팔등신 미녀들이었으니 일견 딸들의 이상형에 대한 것을 나무랄 것은 아니다. 아내는 여자로써는 키가 큰 편이어서 여고시절 교련시간에 향도를 하기도 했다. 큰 아이와 둘째는 다행히 외탁을 하여 또래의 상위권에 속하는 키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내는 친탁을 했는지 영 크지를 않는 것이어서 마음이 쓰인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라 아직 성장판이 열려 있을 것이지만 아내도 그랬고 두 딸도 생리가 일찍 시작되어 아마 막내도 그러하리라 생각되어 더욱 졸갑증이 난다. 생리가 시작되고 나면 성장이 둔화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 막내 선물 준비해야겠어요”
“생일이야?”
“이제 정말 여자가 되었어요. 그럴 땐 아빠가 선물을 해주는 거래요”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하기는 오는 세월을 어찌 막으며 가버린 세월을 뉘라서 잡을 수 있을 것 인가. 걷다 보면 열 걸음째를 만나고 또 백 걸음째를 만나듯 내가 버티면 버틴 만큼 세월의 여울은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생리대 사용법을 아내로부터 교육받고 있는 아이를 보다가 이루어 놓은 것 없는데 세월은 왜 이리 야속히 빠른 것인가 싶어 가슴의 한쪽에서 찬바람이 불어 온다. 이제 아이의 날개에 가벼운 깃털이 제대로 돋아난 것이다. 둥지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 제 영역을 새로 정하고 둥지를 지을 날이 점점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이런 과정이 아날로그적으로 흐르는 것은 호로록~ 날개 짓 하며 날아가는 날을 위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자연의 섭리이리라.
며칠째 고민 중이다. 여자가 된 기념으로 어떤 선물을 해 주어야 아이에게 오래 잊혀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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