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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여행기 2008. 3. 13. 16:38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8세기의 신라 사람들은 한반도의 중심이 충주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시엔
    정확한 지도도 없었을 것인데도 현재의 지도를 놓고 보아도 한반도의 중심에 가까운
    충주시 가금면의 남한강에 중원탑을 세웠다. 중앙탑으로 더 많이 알려진 7층짜리 석탑의
    정식 명칭은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이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이 탑에서 보면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치가 잘 조망되는데 강의 범람에 대비하여 탑의 대지를 높게 만들었다.
    이 탑은 기단이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다른 여느 석탑들에 비하여 기단이 높은 편인데 이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시작부가 넓다.
    기단의 각 면에는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 탑신부의 각 층의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치켜세워져 있어서 웅장한 탑을
    오히려 가뿐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지붕의 아래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탑 정상부의 장식은 신라 석탑의 전형을 벗어나 있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조각 수법이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데 중원탑에서는 똑같은 받침돌이 이중으로 겹쳐져
    있으며 그 위에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새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에 비하여 높이가 너무 높아 다소 불안한
    느낌을 주는 탑이 당시대의 탑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건축양식이라는 것이 몇 년을
    사이로 금방 통일되는 것도 아니고 형식이 금방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최소 2~2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는 것이므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1917년 탑을 보수했는데 이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6층 몸돌에서 고려시대의 거울이 발견되어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중수가 있었거나
    2차 봉안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일된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건축의 기법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이리저리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신라의 양식을
    어어 받은 고려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큰 것이 신라가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말이 통일이지 임진강 북쪽은 거의 점령하지 못했으므로 굳이 충주을 중심으로 고집할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고려는 지금 우리 한반도의 모양에 가장 가깝게 영토를 경영하였으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가 가장 영토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문화재를 역사의 거울로 생각해야지 오래된 귀중품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굳이 연대를 낮추어
    잡을 이유는 없지만 일부러 올리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아뭏던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은 누가 세웠으며
    무슨 염원을 담고 있는지는 현재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통일신라의 후기에서 고려의 초기에
    세워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라면 정치적으로 민감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히 평화가 와서
    모두가 편안하기를 염원했으리라.


    남북이 서로 갈라져 칼끝을 맞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중원탑 앞에 서있는 마음을 산란시켰다.

     

    돌아오는 길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둥글고 큰 무지개는 아니지만 중원탑 앞에서의

    무거웠던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과의 동맹복원이라는

    명분에 눌리어 다시 남북관계는 소원해 질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경제인구가

    7천만이 되려면 남과 북이 합치는 길 밖에는 없다. 낮은 저임금의 단물을 빨기 위해 중국으로

    갔던 업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인건비와 물가를 감당못해 되돌아 오고 있다고 한다.

    저임금과 기술과 자본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같은 민족이 공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북에서는 김정일과 군부과 걸림돌이고 남에서는 보수진영이 문제의 걸림돌이다.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지만 지금처럼 서로가 어려울때 힘을 보태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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