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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부야! 미안테이~
    유년의 기억 2006. 3. 29. 11:18

     

     

    오늘은 아침부터 유난히 추워져서 이름뿐이던 겨울의 체면을 세우는듯 하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는데 열려진 창문틈으로 몰아치는 칼바람이 귀볼을
    아릿하게 한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서 무심코 바라본 구석에 누군가가 버리려고 놓아둔
    고깃상자가 눈에 뜨인다.
    어떤 고기가 담겼던 것인지 모르지만 가만히 코를 가져다 대면 밤새 얼어붙은
    비린내가 살살 녹아오를것 같은 자세로 구석을 차지 하고 있다.


    가끔씩 재래시장에 들리게 되면 어물전을 지나게 되는데 알록달록한 몸빼를
    입고 두툼한 장화로 무장한 장사치의 걸걸한 목소리가 떨어져 튀는 바닥에
    아직도 덜 들어내거나 덜 팔린 상자로 부터 말끔히 비워진 상자까지 고깃상자가
    즐비한 것도 하나의 시장풍경이다.


    나는 그런 고깃상자를 볼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비록 이름도 잊어버려서 그야말로 추억속의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나이로 여덟살이 된 어느날 아침에 눈을 떳을때 엄마는 깨끗한 옷을
    입고 하얀 무명손수건을 세로로 곱게 접고 계셨다.
    시골에서 손수건이 소용될 일이 없었던 터라 엄마가 곱게 접고 계신
    하얀 손수건은 차라리 경건해 보이기도 했었다.


    아침을 먹이고 엄마는 며칠전 구포장에서 새로 산 옷을 내어 입히고는
    왼쪽 가슴에 옷핀으로 손수건을 달아주셨다.


    "이거는 와 다는데?"
    "학교 갈라카믄 달아야 되는 기라.."


    그렇게 엄마의 손을 잡고 입학이라는 세로운 세계로 가는 선을 넘었다.
    새옷...새책...새 고무신....새연필...
    게다가 오랫동안 장롱에 들어있던 '민주XX당 국회의원 ⓞⓞⓞ'라는 글씨가
    금색으로 새겨진 분홍색 보자기까지 모든게 새것 일색이였다.


    우리집은 학교와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학교쪽의 시멘트블록 담과 우리집의
    탱자나무 울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앞쪽으로는 대문이 없는 골목이 한참의 길이로 있었고 앞쪽과 옆쪽으로
    일본식 집이 두채..그리고 앞쪽으로 한참 나가 초가 한 채가 있었다.
    앞집은 구포시장에서 꽤나 큰 어물전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그 집에는
    온 마당이 나무로 만든 고깃상자들이였다.


    지금이야 누가 애써서 수거해서 재활용하지도 않지만 그때는 알뜰하게
    모아서 재활용을 했고 아예 구포시장에는 고깃상자만 수리를 해주는
    목수아저씨도 있었다.
    집에 나고 들때마다  앞집의 고깃상자들은 눈에 들어왔고 그 고깃상자가
    풍겨내는 비릿함에 저절로 익숙해 졌다.


    입학식이 있었던 다음날은 입학식때 보다 더 가슴이 떨렸다.
    엄마라는 보호막이 골목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사라져버릴것이기 때문이다.
    그 불안함은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도 마찬가지 였던지 아침에 내손을
    잡고 앞집대문을 열었다.
    앞집에는 4살 위의 누나가 있었다.
    아마 그때가 4학년 이였을 것이다.
    "누부야 손 딱잡고 가거래이~"
    누부야는 누나를 부르는 경상도 사투리다.


    학교수업을 마치고도 나는 철봉밑에 동그마니 앉아서 기다린다.
    고학년은 한두시간 수업을 더했으므로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수업을
    마친 누나는 종종걸음으로 철봉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렇게 1년쯤을 그 누나의 손에 이끌려서 학교를 오가곤 했었다.
    그 누나는 돈을 참 잘 썻다.
    돈이 정말 귀했던 시절이였는데 누나는 동전도 아닌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과자도 사주고 가끔씩 장난감도 사주곤 했다.
    앞집에서는 유일한 고명딸이라서 그런지 마치 나를 친동생 이상으로
    끔찍하게 위해 주었다.


    내가 3학년때였던가...나는 누나가 부자인 이유를 알았다.
    '삥~땅'
    그건 바로 삥땅이라는 것을 통해서 조성된 일종의 비자금 같은것이였다.
    누나가 이야기해준 삥땅의 방법은 이랬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보면 돈을 갖추려서 담을 여유가 없다.
    특히나 닷새마다 돌아오는 구포장날이 있는 날은 앞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혼이 다빠져 나갈 지경이라고 할 만큼 바쁘다고 했다.
    저녁에 마치고 집에 와서 전대를 풀어내면 구겨진 지폐..동전등을 갖추려
    세는데 국민학교 고학년이던 누나도 중요한 역활을 한다고 한다.
    지폐는 지폐대로 동전은 동전대로 종류별로 갖추려 주는게 누나가 맡은
    일이라고 했는데 그 일을 할때는 꼭 누나는 양말을 싣는다고 했다.


    "오늘 칼치는 몇 상자나 나갔더노?" 하면서 아저씨와 아줌마가 시선을
    맞추는 순간에 지폐 한장이 양말속으로 들어간다.
    "내일은 박목수한테 고깃상자 좀 고치라 카소!" 이러면서 시선이 돈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동전 몇개가 반대쪽 양말로 들어간다.


    아마 고명딸의 이 삥땅을 아저씨와 아줌마가 몰랐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늘 집을 비우고 장사하느라 보살펴주지 못한 미안함이 알면서도 은근슬쩍
    못본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누나가 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예쁜 교복을 입고 골목길에서 잠깐씩
    스치듯이 만날 때 즈음에 처음으로 그 누나의 눈물과 통곡을 보았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있는데 "아이고~ 아이고~"하는
    아줌마의 소리로 부터 마치 메아리처럼 '아버지예..아버지예.."하는 그 누나
    특유의 목소리가 담을 넘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이고 조금 있다가 구포시장안에 있던 친구네 장의사에서
    하얀 조등을 가져다 골목에 걸었다.
    아마 한 사흘은 족히 누나의 계속되는 울음과 눈물을 보아야 했다.


    누나의 아버지였던 그 어물전 주인은 늘 웃고 다녔다.
    저녁에 장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다가 웃집인 우리집에 들러서 내미는
    봉다리에는 팔다가 남은 생선 몇마리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아저씨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대그이 꾸버 먹이시소"
    올망졸망 사남매(그때는 막내는 없었다)가 있건만 늘 그렇게 내이름을
    불러주며 고기 몇마리를 주는 날에는 고소한 냄새가 목젖을 간지럽혔다.


    그 아저씨가 제일로 좋아하는 것은 어쩌다 장에 나오는 참복이였다.
    장날 간간히 나오는 참복은 인기가 좋아서 금방 팔려버린다고 한다.
    아저씨는 아줌마 몰래 한두마리를 감추어 두었다가 집에 가져와서 복요리를
    해드시고는 했는데 어쩌다 마주쳐서 한그릇 권해도 아무도 그 복국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아저씨가 좀 특별해서 치명적이라는 복의 피를 조금 넣어서 국을 끓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만다.
    "월래 뽁쟁이국은 피가 들어가야 알쌈하다 카이~"


    그랬는데 어느날은 도를 지나쳤던지 그렇게 복의 독에 중독이 되어
    외동딸과 아줌마만 달랑 남겨두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 버렸다.
    담넘어로 들리던 그 애간장이 끊어질듯 슬피우는 그 누나의 울음에는
    전염성이 있는지 마음이 모질기로 소문난 우리엄마도 눈물을 흘렸다.


    나도 중학교로 가고 이사를 하고 하면서 점점 잊혀지고 말아서 지금은
    이름조차 얼굴의 윤곽조차 기억에서 消去되고 흔적도 없지만 가끔씩
    시장통이나 오늘 아침처럼 골목길에서 뒹굴어 다니는 고깃상자를 보면
    아주 오래전 상처의 흉터가 주는 까끄러움처럼 슬그머니 포장을 들추고
    나오는 추억이다.
    어쩌면 이름조차 얼굴조차 잊어버린것이 못내 미안한 탓은 아닐런지....


    "누부야! 미안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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