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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덕아재의 삼륜차
    유년의 기억 2006. 3. 29. 11:08

    내가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알람시계가 없었다.
    그래도 항상 일정한 시간에 부모의 개입없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2가지의 요인 때문이였다.


    "째치구~욱...사이소...째치이~~꾸욱..."
    "탈~~ 탈~~~탈~~~"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호지 봉창을 발그레 달구는 햇살과 섞여서 전해지는
    이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이 뜨여졌다.
    거의 매일을 엄마는 한종지의 재첩국을 산다.
    양동이에 넣고 위를 비닐로 덮고 까만 고무줄로 동여매고 머리에 이고
    팔러다니는 제첩국은 농축액이나 마찬가지이다.
    엄마는 그렇게 구입한 한종지에다 물을 더붓고 양념을 가미해서 아침상에
    올리면 보리밥 한덩이를 말아서 후루룩~ 목넘김을 하는게 일상이였다.


    "째치구~욱...사이소...째치이~~꾸욱..."


    이 소리는 아침에 항상 눈을 뜨게 만들었지만 막상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하는것은 항상 또 다른 소리였다.


    "탈~~ 탈~~~탈~~~부르렁~~부릉~~"

     

     

     

    길고 좁은 골목의 안쪽에 살던 명덕아재(동네의 노인들이 명덕아~~명덕아~
    불렀으므로 우리들은 명덕아재로 불렀다.)는 용달차를 몰았다.
    바퀴가 3개 달린 삼륜차는 명덕아재의 직장이고 가장 큰 재산이였다.
    골목안집이라 주차장이 마뜩치않던 명덕아재는 저녁에 일마치고 오면
    우리집 탱자울밑에 차를 세워 두었다.

     


    명덕아재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항상 달랐던것 같았다.
    어떤때는 해가 저물지도 않아서 들어올때도 있었고 어떤때는 "탈~탈~"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깨고보면 달이 봉창에서 보일만큼 한 밤중이였다.
    그래도 아침에 집에서 나가는 시간은 늘 정확했다.


    그래서 명덕아재가 3륜 용달차에 시동을 걸고 탈~탈~거리면서 봉창밑을
    떠나는 순간이 내가 비로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요일날에도 2개의 각기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다른것이 있다면 일요일날 아침에
    "째치구~욱...사이소...째치이~~꾸욱..." 소리를 들어면 즉시 발딱 일어나서
    푸우~~푸..세수를 하고 옷을 걸치고 쪼르르 대문을 나가서 명덕아재의
    3륜 용달차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다.

     

     

     

     


    용덕아재와 나는 그냥 씨익~ 웃는게 대화의 끝이였다.
    지금으로 치면 5분거리에 있는 구포역전까지 명덕아재는 차를 태워주었다.
    구포역전은 용달차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다.
    하루종일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용덕아재는 그곳까지 출근길에 나를
    태워다가 역전에 내려놓는다.


    구포역에서 둑하나를 넘어면 구포다리 밑이다.
    그곳에는 새로운 구경거리가 즐비하다. 예전에 구포는 강을 통한 교통이
    발달하고 낙동강의 어업이 발전했던 곳이라 어선이며 모랫배며 사람을
    나르는 도선이며 관광객을 위한 여객선등으로 제법 큰 항구였다.


    그곳에는 펄쩍~펄쩍~ 뛰는 잉어며 가물치며 장어며 붕어들도 있었고
    허벅지를 허옇게 드러내고 빨간 루즈를 입술에 바른 작부들도 있었다.
    그물도 손질하고 어구도 손질하는 영락없는 바닷가 항구의 모습이였다.


    슬슬 걸어서 구포둑을 타고 걸어오는 길에는 넝마주이들이 살던 곳도
    지나서 오는데 둑위에서 내려보면 별의별것들이 다 있는 보물창고와
    같았다.
    색색의 종이며 몇무더기나 되는 책이며 라디오며 전축같은 것들....
    등에다 매고 다니며 무었이나 집게로 집어서 넣던 넝마주이들의 터전을
    지나 좀 더 오면 만나는 작은 갈대밭은 항상 할머니를 생각하게 한다.


    "요게가 우리 대그이 탯줄을 안 묻었나..용왕님이 도와줄끼라.."


    내 탯줄은 우리 할머니가 직접 가져다 묻었다고 한다. 갈대밭에 묻었으니
    용왕님이 늘 내 앞길을 책임져 주실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엄마는 설날 새벽에 목욕재계하시고는 거실에 상하나를 놓고
    하얀 사발에 정한수를 떠놓고 용왕님께 치성을 드린다.
    "용왕님요~~ 용왕님요~~~" 하시면서 말이다.


    일요일마다는 아니지만 몇년을 그렇게 명덕아재는 일요일 아침에는
    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내가 명덕아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월남치마라고 한참 유행하던
    치마를 이쁘게 채려입고 다니길 좋아하던 아지매가 떠나고 나서 얼마후
    어리던 딸 하나를 데불고 동네를 떠났기 때문이였다.

     

     

     

     

     

    그때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같다.
    동네 어른들이 하시던 말이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였다.


    "에이~~ 미친년!! 천벌을 받을끼구마..."
    "춤바람도 마 대강하고 돌아오믄 델낀데..."
    "그기마 사람 마음대로 대나..머...젊은 놈하고 도망가뿟는데...."
    "명덕이만 안됐다 아이가...밀양에 있는 고향으로 갔다믄서..."


    장난감 삼륜차에서 자꾸 명덕아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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