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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 19 (겨울1)
    유년의 기억 2006. 3. 29. 11:02

    사람에게 옛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 해볼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래는 예상만 될 뿐이고 따지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람의 머리속에 형상화되어 저장된것 전부가 과거인 것이다.


    유년의 기억을 정리하다가 보면 자꾸만 옛기억들이 가지를 쳐서 마치 아주 마른
    논바닥이 균열하듯 얼키 설키 엮여있다.
    그래서 이런 기억의 정리가 필요한 것일 것이다.


    유년의 기억에 대한 정리도 봄..여름..가을편을 거쳐서 어느듯 계절에 걸맞게도
    겨울편이 되었다.
    이 유년의 기억이 끝이 나면 중고등학교를 묶어서 까까머리의 추억을 또 다시
    정리해 볼 생각이다.

     

     

     

     

    겨울의 기억은 항상 추웠다.
    연료가 딸리던 시절이라서 항상 넉넉하게 군불을 때기가 어렵고 또 방의 온기가
    아랫목에 한정되어 윗목은 항상 추워서 잘 때에도 덧옷을 입고 잠을 자야만 했다.


    겨울에는 아버지와 엄마는 동네사람들과 여럿이 어울려서 30리 산길을 걸어서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한번가서 아버지가 한짐 지고 엄마가 한짐을 머리에 이고오면
    한 일주일쯤의 연료가 해결이 된다.


    내가 중학교에 갈때쯤에 연탄으로 바뀌어서 더 이상 나무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동네에서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무를 하러 가는 날이면 젖먹이였던 막내를
    내가 건사를 해야만 했다.


    배부르게 젖을 먹여놓고 가면 최소한 몇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여서 동생은 늘
    부모님이 오기도 전에 배가 고파 울게 마련이였다.
    그럴때는 옆집의 할머니한테 부탁을 하면 밥물이란걸 만들어 주셨는데 밥솥의
    밥이 막 끓기 시작하면 그때 물을 좀 퍼내면 걸쭉한 밥물이 되었는데 식혀서
    떠먹이면 엄마의 젖을 대용할 정도였다.


    겨울에는 최고의 놀이가 따뜻한 양지녘에서 팽이를 돌리거나 연날리기가 차지했다.
    겨울에는 유난히 불이 많았고 길가나 전봇대에는 불조심 표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가 접하는 광고는 항상 극장포스터와 불조심 표어였다.


    학교를 가도 수업중간에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양지쪽에 모여서 논다.
    대개 학교건물의 양지쪽벽에는 바람도 잘 불지를 않는다.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벽에다 등을 대면 햇볕에 달아서 온기를 간직한 콘크리트가
    등을 따뜻하게 해준다.


    문학작품에서는 항상 콘크리트는 차가움의 대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콘크리트는 따스했다. 세상의 어느것보다도 내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학교건물의 한쪽벽에는 항상 특정한 문구들이 쓰여져 있었다.
    반공 방첩...간첩신고는 113...착하게 서로돕고 부지런히 공부하자..등등...


    지금보다 그때의 추위는 혹독했다.
    기후가 변하는지 지금은 많이 따스해 졌지만 부산에서도 12월 중순쯤에는 여지없이
    개울이나 물이 들어있는 논은 얼음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12월에 접어들면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만든다.


    썰매라고 하는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하교후에 구포시장을
    기웃댄다. 특히나 고깃전에 가면 생선상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버리는 것은 없다.
    상자하나의 값도 값이려니와 땔감도 귀한 판에 누가 그 상자를 버리겠는가.
    어쨋던 우리들이 구포장에 기웃대면 그래도 상자 두어개는 구할수 있었다.
    그리고 만들어 놓은 앉은뱅이 스케이트(썰매)를 마루밑 한쪽에 잘 갈무리를
    해두고 얼음이 얼기만을 기다라고 기다린다.


    또 하나 겨울놀이중에 백미는 연날리기였다.
    연을 날리려고 하면 연을 만들던가 사야만 하는데 연을 만들려고 하면 창호지가
    있어야 하는데 비싼 창호지 구하기가 호락하지 않았다.
    연날리기는 가난한 우리들에게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였다.


    그래도 시장통 아이들은 쉽게 사거나 만들어서 연싸움을 자주했고 가끔씩 어디선가
    날라온 연을 줏어서 날리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는데 집에 나이롱 실이 없어 누런
    면실로 날리다 보면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끊어져 날아가버려 애를 태우게 했었다.

    바로 옆집이 일제때 지어진 적산가옥(일본인으로 부터 압수해서 분양한..)이였는데
    그 집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이 있었다.
    한번은 어디선가 날아와서 우리집 탱자나무에 걸린 놈을 이게 어인 떡이냐하고 줏어서
    집에 있던 면실을 묶어서 신나게 날렸는데 시장통에서 국수공장을 하던 친구놈이
    나이롱줄로 연싸움을 걸더니 몇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만 툭~끓어져서 하늘로 훌훌
    날라가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하던지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와서 마루에 앉아있으니 눈물이
    피잉~하고 돌 정도다.
    창문너머로 가만히 보던 그 형이 사정을 알고는 연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사금파리 조각을 줏어 오라고 하더니 망치로 깨어 가루로 만들어서는 연줄에다
    풀을 먹여준다.
    한 며칠동안 얼마나 신이 나던지..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났다는 말이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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