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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 17 (가을5)
    유년의 기억 2006. 3. 28. 15:37

     

     

    어린시절에 가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확의 계절"이 였는데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 할것없이 "단풍놀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그만큼 세월이 변했다는 이야기로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을듯 하다.


    어제는 결혼 17주년을 기념하는 여행을 다녀왔다.
    경남 창녕의 부곡온천에서 1박을 하고 나오는데 호텔앞에 시골할머니가 앉아서
    감..콩...들깨등을 팔길레 감 한박스를 흥정하는 사이에 같이 곁다리로 팔고있는
    찐쌀을 한 웅큼 맞보기로 털어넣고 씹었는데 예전에는 추수가 다 끝나고 휑하여진
    논바닥을 훑으면서 떨어진 알곡을 주워모우거나 저번에 이야기 하였던 논둑에 만든
    들쥐들의 곡식창고를 털거나해서 모아진 짜투리 곡식으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찐쌀도 아예 추수한 그대로 나락으로 만든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렇다.
    "하이고~~ 말도 마소..요짐 이삭가꼬 맹글어노으믄 누가 사묵는기요?"
    한알의 곡식이라도 버리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시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추수가 끝난 들판에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는데
    요즈음은 볼수가 없으니 모두가 편해진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탓인지 모르겠다.

     

     

     

     

    요즈음의 들판에 나가서 아직 수확하지 못한 논의 벼를 보면은 거의 대부분이 벼와
    피가 공존을 하고 있다.
    예전에 농사꾼에게 제일 중요한 일중의 하나가 논에 나가 피를 뽑는 일이였다.


    나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정도때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며 피를 구분하는
    일을 배웠고 학교를 파하고 오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햇살에 목덜미를
    새가맣게 단근질해가면서 피를 뽑았다.


    요즘의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 벼를 심기는 했으되 관리를 알뜰하게
    할수도 없고 인건비도 비싸서 방치해두다 보니 어떤 논에는 피가 나락보다 더 많다.
    그러니 요즘은 동네에서도 이런 말을 더 이상 들을수 없게 되었다.


    "어~~ 박씨...어데가노?"
    "피뽑으러 안가나...김가네는 뽑았나?"
    "어허~~ 이사람아...안자 피뽑으믄 모는 머묵고 사노? "


    피는 모심기 직후에는 거의 벼와 흡사해서 여간해서 골라내기 어렵다.
    그래도 뽑아내야 하는 것은 마치 회충이나 십이지장충처럼 주변에 있는 벼의 영양을
    가로채먹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세하게 잘 살피면 알수 있는데 커갈수록 구분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놈들은 적응도 빠르고 해서 벼보다 항상 웃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것은 모심기직후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벼가 흡수해야할 영양분을
    덜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지런한 농사꾼의 논에는 수확을 해야하는 가을쯤에는
    논에 피가 하나도 없이 그야말로 황금빛으로 출렁대는 논을 뿌듯하게 바라볼수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에서는 삽과 바께스를 들고 논의 무자리(논의 물이
    많은 부분)를 파헤치면 진흙속에 여기저기 박혀서 이제 겨울을 날 준비를 마친
    미꾸라지를 볼수 있는데 잡아서 추어탕을 끓여먹는 것도 가을의 정취다.


    이렇게 두사람이 삽으로 두세시간의 노동이면 바께스를 가득 채울만큼씩 잡고는
    했다. 추수가 끝나고 두어주 지나고 나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논으로 나가서
    반바께스쯤의 미꾸라지를 잡아서 오면 엄마는 커다란 양재기에 미꾸라지를 붓고
    한웅큼의 소금을 뿌리고 플라스틱 소쿠리로 덮어놓는다.


    그러면 양재기안은 난리가 난다. 대표적인 민물고기인 미꾸라지에게 소금을 뿌렸으니
    투다닥~~ 투다닥~~ 몸부림을 치다가 차츰 조용해진다.
    그렇게 끓여내는 추어탕은 며칠 우리의 식탁에서 제일 중요한 메뉴가 된다.
    지금에야 양식을 하는지 사시사철 나오지만 미꾸라지 매운탕은 가을과 겨울의
    초입에 잡은 놈이 제일 맛있다.


    이제는 농사에 있어서 물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 계절이라서 어른들은 몇 명씩 짝을
    이루어 소류지(작은 못)로 가서 물을 퍼낸다.
    하루종일을 퍼내면 진흙바닥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바께스를 들고 들어가서 붕어며
    가물치 그리고 메기등을 잡아서 온 동네가 잔치를 벌린다. 특히 동네의 어른들을 모셔서
    대접하고 했으니 요즘의 경로잔치인 셈인데 그때는 그런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의례
    일년에 두어번 씩은 있었다.
    물론 어른들만의 잔치는 아니였고 아이들에게도 한 그 잔치의 한곁에서 배를 불렸다.
    가을이 풍요의 계절인것은 이렇게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 계절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텔레비젼이라고는 동네 목수아저씨집에 달랑 한대만 있을뿐이였는데 연속극을
    할때쯤에는 동네 아줌마들로 발 디딜곳이 없었다보니 동네 남자들은 넓은 사랑을 가진
    통쟁이아저씨집에 모여서 막걸리나 댓병소주로 소일하기가 가을의 여가였다.


    그 당시에는 "계"라는 것이 유행을 했는데 '반지계','혼사계','시계계'등등 종류도 많았다.
    가을의 바쁜 농사일이 끝나면 '단풍놀이','온천관광'등을 가는데 이때는 비용을 그 동안
    푼돈을 조금씩 떼모은 "곗돈"으로 가는게 보통이였다.


    그렇게 멀리 가보는것도 시골아낙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였거니와 술마심도 체면 차릴일도
    없고 보니 떠나기위해 동네어귀에 관광버스가 시동도 걸기전부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각에 다시금 돌아온 관광버스에서는 벌건 얼굴의 술취한 아낙들을 쏟아내고
    우리들은 사다준 'XX관광기념'이 인쇄된 연필,볼펜,책받침등을 받고 좋아라 했다.


    이렇게 유년시절의 가을은 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했던것 같다.
    풍요로움이 사시사철 계속 주변을 채우고 있는 요즘을 살면서도 그 때 그 시절의
    가을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쩐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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