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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성질하던 우리 엄마
    유년의 기억 2006. 3. 28. 15:32

    울 엄마...


    로에빙거라는 교육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성인들이 자기보호단계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단계는 다소 유아적인 데가 있는 단계이므로 어쩌면 울 엄마라는 유아적 용어가
    심금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우리엄마는 성격이 좀 강한 호랑이띠다.
    그래서인지 성격이 무지 괄괄하고 욕도 무지하게 잘하는데 뒤끝은 별로없다.

     

    이제 70을 앞에두고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셨다.
    위로 오빠셋과 언니하나가 있었다. 물론 나에게는 외삼촌과 이모님들이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서와 같이 한여름 논에 김매러 나갔다가 징집되어 이웃의
    아주머니에게 호미 두자루만 달랑남겨두고 전장터로 가신뒤에 영영 不歸의 客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세월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일제 수탈의 정도가 극에 달할 무렵에 제일 맏이였던
    큰언니 (나에게는 이모님이다.)는 시집을 간 다음에 신랑따라 만주로 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웃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만주의 마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중국에도 공산당이 날뛸때라서 우리나라의 이장쯤되는 자리를 있었던 이모부와 이모가
    화를 피할려고 잿간에 재를 파고 그안에 숨어 있는데 죽창으로 찔러서 죽였다는 것이다.
    피가 마치 분수처럼 쏟구치더란다.

     

    그후에 외조부는 심장이 상해서인지 노름에 빠져서 밤낮없이 투전에 몰입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이사를 14범 정도를 하셨다고 하니 그 노름의 정도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만하다.


    한번은 외할아버지가 노름을 하고 새벽에 산을 넘어 돌아오는데 숲에서 자꾸 흙을 던져
    대경실색을 하였다고 한다. 알고보니 삵이라는 동물이였는데 다리는 오금이 저리고
    겨우 집에 돌아와서는 며칠이고 앓아누우셨다고 한다.
    그래도 몸을 추수릴만 하자 다시 노름에 나섰다고 하니 외할머니도 그랬지만 우리 엄마도
    어린마음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큰 언니를 빨갱이들에게 잃고 오빠들마저 그 싸움에서 잃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나라에서는 다시금 하나 남은 막내외삼촌에게 징집영장을 보냈더라지..
    얼마전에 태극기 휘날리고에서 강제로 징집해가는 것을 보고 우리 국군은 그런일이 없었
    다고 핏대를 올리는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사실 그런 인간들을 국민이 탄핵을 해야 하는데..
    암튼 대를 잇는다는게 나라보다도 더 소중한 외삼촌은 어린나이에 오른손 검지를 작두에
    올리고 뎅겅 잘라버렸다고 한다.
    무었을 하는지도 모르고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냥 피가 쏟아져 나와서 얼마나 울었으며
    겁이 났었는지 모랐다고 한다.

     

    옛날의 우리 부모들이 대개 그랬듯이 얼굴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할머니의 성깔 또한 대단한 분이셨는데 아마도
    동네안에서는 견줄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참 시집살이도 고되게 하신분이다.
    지금도 막내손녀가 시어머니를 꼭 빼닮아서 보면 생각나신다고
    "아이고 그 할마시 성질은 닮지 말아야 할낀데..그 설질 닮으면 우야노.." 이러실 정도다.


    나는 핏덩이때 병치레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경기를 자주해서 꼬로록~ 넘어가면 들쳐없고 불도없는 그 먼길을 걸어서 시장까지 가서
    따주는 할머니를 찾기도 하고는 했는데 그 길가에는 사람이 자주 죽는 사고가 나서 밤이면
    사람들이 꺼리는 건널목도 지나야하고 6.25때 가가이 있던 야전병원에서 죽어나온 사람들을
    임시로 묻어두던 골짜기도 지나야 했으니 젊은 새댁의 그 고충이 대단했으리라.


    한번은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하던일은 있고 어정쩡한데
    갑자기 눈을 바깥쪽으로 얼핏두는데 꼭 만주에서 죽었다는 언니가 휘익하고 지나가더란다.
    "아이고~~ 언니..."하고 따라 나가보니 방금까지 놀고 있던 아이가 온데간데 없더란다.
    아차싶어서 보는데 마당가에 놓여있던 돼지죽통(그때는 집집마다 이런게 있었다.)에
    발이 두개 하늘을 보고 있더란다.
    제법 높은데 누가 일부러 박아놓은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놀라서 건져놓고보니 이미 숨도 놓아버렸다고 하는데 어찌 살게되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아마도 1~2분만 늦었더라도 이세상 사람이 아니였을거라고 하셨단다.
    그후 그 의사는 주치의처럼 거의 15년 가까이 나를 돌보아 주신분이다.
    내과의사였는데도 어떤때는 자전거에 부딪쳐 찢어진 눈두덩도 기워주시고..가끔은
    원기소도 공짜로 한병씩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선천적인지 동물을 잡지 못한다. 여기서 잡는다는것은 도살을 이야기한다.
    겨울이되면 동네 아저씨들은 산에 가서 산토끼를 몇마리 잡아오시는데 항상 한마리는
    우리집에 가져다 주셨다.
    "아지메..이거 푹고아서 대근이 먹이소..밤넣고 고아믹이면 몸에 조십니데이.."
    그러면 아직 살아서 숨이 붙어있는 토끼를 잡는 것은 울 엄마 차지이다.
    주는것도 고마운데 잡아달랄수 없으니 직접 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것도 솜씨가 늘어서 닭으로 발전했다가 집에서 기르는 염소에 이르기까지
    엄마는 만능슈퍼우먼이 되셨다.


    지금은 그런 옛날의 성깔이 많이 수그러 지신것 같다.
    그런 울 엄마가 오히려 나를 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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