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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유년기 12 (여름6)
    유년의 기억 2006. 3. 28. 14:58

    여름의 밤에는 동네애들이 누구네 사랑채에 모인다하면 반드시 스릴넘치는 놀이의
    하나인 수박서리, 참외서리가 있게 마련이었다. 해가 어스럼해지면 모여서 놀다가
    완전히 어두워지면 작전을 개시한다.

     

    우리는 일단 2개조로 편성하여 일개조는 원두막에서 주인이 보이게 그 앞을 어슬렁
    대면서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조는 철조망을 들고 들어가 수박이나 참외서리를 한다.
    어떤 때는 제대로 잘익은 것을 따와서 배를 불리기도 했지만 어떤때는 덜익은 것을
    서리해오기도 해 그냥 버리기도 한다.

     

    재수가 없으면 주인한테 잡혀서 혼줄이 나기도 했는데 대개는 혼줄을 내고나서 수박
    한통이나 참외 두서너개를 주셨다. 옛날에는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인심들이 후했던지
    서리를 하다가 잡혀도 꿀밤을 쥐어박으면서 `이눔들아! 딸려면 익은 것을 따야지...
    먹지도 못할 것을 따서 버리면 천벌받는다!` 하시고 보내주시곤 했다.

     

    여름에 제일 신나는 일을 꼽으라면 역시 여름방학이다. 나는 방학때는 언제나 외가로
    갔다. 외조부모님으로는 첫손자였다. 친손자를 나보다 2년 늦게 보셔서 당신들 생애에
    첫손자로 자리매김해서 인지 무척이나 아껴주셨다.

     

    외가에는 농사가 제법 많았기 때문에 방학동안은 매일 쌀밥을 먹었다.
    외가는 밀양군 하남면 은산리에 있었는데 장날에는 외삼촌은 나를 데리고 장으로 가서
    이발도 시키고 어떤때는 옷도 한벌씩 사주셨다. 장날에는 항상 칼치를 사서 새끼줄에
    매달아 오셔서 무와 함께 넣고 국을 끓이거나 구어놓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외가에는 소가 한 마리 송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외양간옆에 잿간이 있고 그옆에는
    변소가 있었다. 각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는 모두 재갓에다 모았다가 거름으로 쓴다.
    잿간에는 짚으로 만든 바구니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는데 암탉의 산란장 이었다.
    그 곳에서 나오는 계란으로 외숙모님은 계란찜을 해주셨다.

     

    마당이 넓은 외가에서 한참을 뛰어 놀다보면 `근아~~~~~`하고 부르시는 외조부님의
    소리가 들리면 사랑으로 들어가면 앉은뱅이 책상의 서랍을 빼면 나오는 뒷 공간에
    비닐에다 꽁꽁싸서 고무줄로 챙여둔 바람사탕(하얀 박하사탕을 이렇게 불렀다....
    아마 입에 넣으면 단맛 보다고 박하향으로 시원해지기 때문인듯...)을 몇 개씩 주셨다.

     

    친손자인 외사촌동생도 그때나 겨우 한 개씩 얻어걸려서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나에게 정이 깊으셨는지 짐작이 된다.

     

    낮에는 외가동네의 형들에게 노래도 가끔씩 배웠다. 라디오가 귀했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형들은 열심히 가르쳤고 나도 열심히 배워서 방학동안 두세곡씩 배워서
    돌아오곤 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노래는 나훈아의 노래였지 싶은`물~어 물~어
    찾아왔소~~~~`이다.

     

    그때 방학 숙제로 반드시 나오는 것이 곤충채집이 있었다. 지금이야 문구점에서
    포집망을 팔지만 그때는 그물도 돈을 주고 사야되므로 아버지는 철사를 둥글게
    만들어 대나무 끝에 던단하게 고정시켜 주셨다. 그러면 아침 일찍 숲으로 가면
    거미줄이 엄청 많았는데 둥근 철사에다 거미줄을 묻친다. 이 작업을 여러번하면
    테니스 라켓처럼 거미줄로 만든 훌륭한 포집도구가 되었다.

     

    잠자리가 나무가지 끝에 앉아 있으면 다가가서 거미줄 포집체를 살짝 들이대면
    잠자리의 날개가 그물처럼 얽힌 거미줄에 달라 붙어 잡혔다.

     

    산에가서 참나무밑을 잘 살피면 장수하늘소(지금은 매우 귀하여 졌지만..)가 흔히
    있었다. 우리들은 한 마리씩 잡아다가 서로 싸움을 시키면서 놀다가 시들해지면
    포르말린 병에다 넣었다가 핀을 꽂아 방학숙제로 활용하였었다.

     

    동네의 느티나무에는 여름이면 매미들의 소리로 늘 시끄러웠다. 여름에는 우는
    곤충들이 많다. 가을에는 귀뚜라미 하나만 유독 띄어나지만 여름에는 매미, 여치
    개구리, 구렁이(우는 소리가 황소개구리와 비슷하다)등등 많았다.

     

    여기 저기 늘려있는 보리짚이나 밀짚중에서 굵은 놈으로 손바닥 길이로 두 개를
    준비해서 서로 꿰어 열십자를 만들고 조금 작은 놈을 네군데에 꼽아서 조금씩
    안으로 가게 엮어 나가면 멋진 여치집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여치집에다가 매미나
    여치를 잡아서 넣고 마루에 매달아 놓으면 한동안 찌르르~~~ 맴맴~~~~하는 청량한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여름에는 유달스럽게 맛있는 메뉴중의 하나가 국수였다. 특히 구포는 `구포국수`로
    전국에 소문난 곳일 만큼 시장에는 국수공장이 많았다.
    국수공장이래야 그리 크지는 않고 조그마한 가내공업형 공장이였는데 국수를 뽑아서
    사람키보다 긴 다발을 건조장에 늘어놓으면 장관이었다. 말리고 걷고 하다보면
    바닥에 국수토막들이 떨어지고는 했는데 추수후의 이삭을 줏듯이 그것들을 줏어다가
    삶아서 오이냉국에다 말아서 먹고는 했다.

     

    그렇게 줏어모은 것도 그냥다 삶는 것이 아니고 짧은 것들은 따로 모아서 나중에
    밥과 신 김치와 함께 넣어서 밥국을 꿇여 먹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궁색한 살림이었고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애쓰신 부모님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여름의 땡볕에 뚝방은 늘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서 우리를 즐겁게 했고 더불어 자라난
    풀로 인해서 자연의 미끄럼틀을 우리들에게 제공했다. 각자의 집에서 비료포대기를
    하나씩 가지고 뚝방으로 모여서 제일 꼭대기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온다.

     

    늦은 여름에는 우리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내 키만큼의 길이로 대나무를 잘라서
    끝을 돌로 때려서 쪼갠 다음에 큰 대못을 거꾸로 박아서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면
    보기에도 멋있는 창이 되었다. 못을 돌로 만든 낫가는 숫돌에 돌려가면서 정성스레
    갈면 그 끝이 송곳처럼 날리 선다. 이제는 들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때의 공장을 돌리는 조요한 수단이 벨트였는데 일명 `피데`라고도 하는 이것의
    수명이 다하면 그냥버리지 않고 모아서 재활용으로 바케스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하나를 옆에 끼고 한손에 창을 들고 마치 밀림의 전사마냥 우리는 들로 사냥을
    나선다. 논 옆의 둑이나 못가의 수풀을 살살 헤쳐나가다 보면 움찔하는 개구리가
    보이고 사정없이 놈의 등짝에다 창으로 냅다 찌르면 포획이 끝난다.

     

    그때는 두꺼비,맹꽁이,무당개구리,청개구리만 빼고는 모두가 먹을수 있는 개구리였다.

     

    한 명이 대충 열마리에서 스무마리 정도씩 잡게되면 물이 졸졸흐르는 시원한 계곡에
    앉아서 지름이 20센티정도 되는 돌을 줏어다가 물에 담구어 놓고 주먹만한 날카로운
    돌을 준비한다.

     

    우선은 개구리의 똥꼬(항문)에다가 보리짚으로 만든 스트로우를 꼽고 힘껏 바람을
    불어넣어면 개구리 배가 불룩해졌다. 그러면 우리는 키들거리며 누구 개구리의 배에
    바람이 많이 들어가는지 내기를 하면서 놀다가 뒷다리를 모아서 한손에 쥐면 개구리는
    일자로 죽 펴진다. 그러면 물속에 조금 잠긴 돌위에 놓고 주먹돌로 개구리의 허리를
    마구 때려서 짛이긴다. 그다음에 머리쪽을 잡고 당기면 개구리는 몸이 두동강이 났다.

     

    그 다음에 몸통의 윗부분은 버리고 아랫부분만 가지고 껍질을 벗겨서 흐르는 물에
    씻으면 하얀 속살이 햇빛을 받아서 우유빛이 되었다.

     

    정해진 당번에 따라서 가져온 성냥으로 마른 잔가지들로 불을 피워서 개구리의 하반신
    을 구워서 먹으면 비록 양은 작았지만 세상의 어느것보다 더 많있는 간식이었다.

     

    그렇게 몇마리씩 구워먹고 남겨서 집에 가져가면 동생들의 간식도 해결되었다.

     

    구포장날은 3일과 8일에 서는데 그 날에는 타동네 사람들이 시장으로 가는 입구인
    우리 마을 지나게 되어 왕래가 많아지는 날인데 그런 날에는 우리는 또 다른 장난을
    준비했다. 우선은 마을길의 가장자리에 50센티 깊이의 구덩이를 판 다음에 어느집이나
    있었던 똥바가지에 똥을 담아와서 반쯤 붓고 얇게 쪼갠 대나무를 얼기 설기 걸치고
    그위에 솔가지를 덮고 다시 흙을 덮고 빗자루로 쓸면 깜쪽 같았다.

     

    더욱 깜쪽같이 속이기 위해 종이나 쓰레기도 좀 여기 저기 뿌려놓고 우리는 그 옆에서
    길을 막고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등을 하며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지 않아 장으로 가는 아저씨 한분이 나타난다. 우리는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도로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딱지를 치는척한다. 아저씨는 일부러 우리들을 피해서
    길옆으로 비켜서서 가다가 갑자기 `어!~~~`하면서 푹 빠진다.

     

    이때다 하고 우리는 꽁지가 빠져라고 달아나서 동네어귀의 언덕으로 가서 낭패를
    당한 그 아저씨를 보면서 배꼽이 빠져라 개글~개글~ 된다.

     

    가끔은 예상과는 달리 동네어른이 빠지거나 친구들이 빠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떡을 해 먹이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걸 `똥떡`이라고 한다.

     

    여름의 농사일은 참으로 고달프다. 가을 추수전이라서 먹는 것도 부실한데다가 의외로
    논일이 많다. 우선은 5월에서 6월에 심었던 벼가 어느 정도 자라면 김을 매주어야 한다.
    모심기는 서로 품앗이라해서 도와주는 의미로 인력동원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은
    김매기는 간단치 않다. 그래서 집안식구들이 모두 나서는데 우리논의 김매기는 언제나
    엄마와 나의 몫이었다. 요즈음은 제초제를 사용하지만 그때는 완전히 인력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던 탓에 참으로 지루한 작업에다 여름의 땡볕이 맹렬히 기승을 부릴 때라서
    더욱 사람을 힘들고 지치게 했다.

     

    벼가 어느정도 자란 상태에서 김을 매면 낮에는 모르는데 밤이 되면 벼잎의 제일 끝에
    뾰족한 부위에 닿았던 곳이 밤새 쓰리고 아파서 잠을 못 이루곤 했었다.

     

    어느 정도 김을 매고나면 이번에는 피(벼와 비슷한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서서 논의 벼를 굽어보며 살피다보면 유난히 발육이 좋으면서도 잎에 벼보다 조금
    진한 흰색줄이 있는 놈이 피인데 이걸 뽑아주어야 벼의 발육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게
    구별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어른들은 잘도 골라서 뽑는데 가끔씩 벼를 잘못 뽑아서
    혼이 나곤 했다. 언제인가 놀이 삼아서 인근의 들에 나갔다가 논을 본적이 있는데
    피가 여기 저기 많이도 있었는데 뽑지 않은걸 보니 요즈음 농촌의 인력난을 짐작할 수
    있어서 씁슬함을 느낀다.

     

     

     


     

    국민학교시절 아마 5학년때이던가..학교교정에서 선생님이 찍어 주셨다.
    유난히 사랑해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잘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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