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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마애삼존불상 (백제 불상) [泰安磨崖三尊佛像]
    여행기 2007. 11. 29. 22:05

     

    태안마애삼존불상 (백제 불상)  [泰安磨崖三尊佛像]

     

     


    불교는 우리민족에게 전래된 이래 민족정신의 밑바탕을 이루기까지 지난한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고 당시 선진문물에 목말라하던 한반도는 그로 인한 문화의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불교를 받아들여 나름의 정착과정을 거쳤는데 지금에 와서는
    고구려 불교는 지역적 제약으로 연구가 쉽지 않으며 백제 불교는 통일신라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그 흔적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경주 불국사의 창건과정에는 백제의 기술자들이 많이 지원했으며 반대로 백제의 무왕때
    지어진 익산의 왕궁사를 지을때는 반대로 신라가 기술자를 지원했다.


    지금은 백제 불교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
    태안 마애삼존불 정도가 눈에 뜨이는 유적이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미소"로 알려져 있는 탓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백제시대의 마애삼존불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탓에 찾는 사람이 드물어 차라리 고즈넉한 느낌을 준다.

     

     


    태안읍에서 학암포쪽 이정표를 따라 조금 가면 태을사와 태안 마애삼존불의 이정표를 만나고
    태을사까지는 백화산 정상에 있는 공군부대로 인해 길이 잘 닦여 있다.  서해안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백화산의 조망은 상당히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정상 바로 아래에 작은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백화산은 태안읍의 진산으로 멀리서 보면 꼭 경주 남산을 연상하게 한다. 바위가 많은 것이 그렇고

    나지막한 산세가 그렇다. 그러나 남산과는 달리 백화산에 오르면 멀리 서해바다와 바다의 젓퉁같은

    섬들이 톱니같은 경치를 만들어 낸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보물 제432호로 전각이 둘러 있다. 높이는 왼쪽 불상 207㎝, 가운데 보살상
    130㎝, 오른쪽 불상 209㎝의 크기로 커다란 바위의 표면에 가운데 보살상을 본존으로 하여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특이한 삼존형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통의 삼존불은 가운데 주불이
    크고 좌우불이 작은것이 상례인데 그런 형식이 파괴되어 파격적인 불상의 풍모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설치되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흔적이
    있으며 지금은 건물을 지어 풍화를 막고 있다. 현재 마멸이 많이 되어 있으며 무릎 아랫 부분이
    흙속에 묻혀 있다.  각 불상은 모두 두광(頭光)과 단판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다. 좌우의 불상은
    손모양만 조금 차이가 있을뿐 닮은 형태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그 위에 작은 육계(肉髻)가
    얹혀 있고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으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신체 역시 어깨와 가슴을 양감 있게
    표현해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通肩)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지면서
    묵직하게 처리되었으며 가슴 위로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수인은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으나, 왼쪽 불상은 가슴 앞으로 올린 왼손에 약합(藥盒)으로 보이는
    둥근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보살상은 두 불상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머리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관의 장식이 어깨 위까지 늘어져 있다. 천의(天衣)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으나 양 어깨를 덮고 내려와 무릎 밑에서 교차되었으며, 두 손은 배 앞에서 모아 보주(寶珠)를
    위아래로 감싸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표현기법상 중국의 북제(北齊) 또는 수대(隋代)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며 높은 보관의 형태와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도상은 부여 신리 출토의 금동보살상을
    비롯한 서산마애삼존불상 등 백제의 초기 보살상에서 많이 보이는 기법이다. 이 지역이 백제가
    중국 대륙과 교역을 하는 중심지 역활을 하였던 탓에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존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해가 뜨는 동쪽인데 불상의 정면에서 보면 꽉 막힌 절벽을 보고
    배치된 탓에 답답해 보인다. 등을 서해, 중국쪽으로 두고 앞쪽을 산과 절벽으로 막혔음에도
    굳이 동쪽, 즉 백제의 수도인 공주 쪽을 두게 배치 된 것은 부처님의 외호를 받으려는 백제인들의
    염원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배치는 서산 마애삼존불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 역시 산으로
    시야가 막혀 있음에도 서를 등지고 동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애 삼존불의 앞쪽에 있는 감모대(感慕臺)

    이 위에 부처님을 향한 예물들이 차려지고는 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사신들이 가장 빠르게 와 닿을 수 있는 바닷길의 종착이고 돌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했었기 때문에 어쩌면 중국 사신들을 맞이 하는 최 전초기지 였을지도 모르겠다.

    감모대(感慕臺)라는 말 자체가 절에서는 잘 사용되는 말이 아니고 모화관처럼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이 깊어 보이기 때문이다.

      

     

    산사의 물 맛은 절마다 조금씩 다르다.

    굳이 혀가 예민하지 않더라도 절에 들러 물 맛을 보게되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냉장고에 들어 앉아 스스로를 식혀 온  청량음료보다 몇 배는 청량하다.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는 태을사의 물 맛도 참 좋은 편이다.

     

    중국으로 갔다가 오는 사람, 가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원을 했으리라.

    "이번 물은 조용하도록 해주십시요"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 청량한 물을 들이키며 앞으로 가야할 먼길을, 자신이 거쳐온 기인 행로를

    더듬었으리라.

     

     

     

    태을사에서

     

    겨울에는 하늘도 바람도

    쪼그라 들어 그저 한 바가지

    누군가 베푼 그도 많아서

    종지 하나에 퍼담아도

    넘치고 넘치는 바람, 하늘

    넌즈시 곁눈으로 웃는

    태안 마애삼존불 오른쪽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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