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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25대 사마 무령왕릉
    여행기 2007. 11. 19. 17:01

     

    백제 25대 사마 무령왕릉

     

     

    우리나라의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시점이 일치하는데 그가 바로 백제의 제 25대 왕 "무령왕"이다.


    경주에 수많은 왕릉이 있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왕릉이라고 밝혀진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부장품의 특징으로 천마총, 왕관총등으로 이름을 붙였고 백제의 왕릉들 역시 1호분, 2호분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기존 발굴되어 있던 릉의 배수로를 내다가 도굴꾼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처녀분의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다른 릉들과는 달리 지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의 주인
    이 무령왕릉임을 알게 해주었다. 이 지석에 의하면 그는 523년에 사망했고 일본서기와 삼국
    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지석에 의하면 무령왕의 본래 이름은 사마(斯摩)인데 이는 섬왕이라는 뜻의 일본식 표기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일본과 백제 본국으로 나누어진 백제 지배층중 일본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령왕의 탄생설화를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 일본 서기를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아내로 삼아 보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각라도(各羅島·현재의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 섬)에서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로써 무령왕은 섬왕, 즉 사마왕이라 불렸다.”
    개로왕의 아우였던 곤지왕자는 왜로 보내졌는데 이때 개로왕에게 형수를 자신의 아내로
    줄것을 요구하였는데 당시 백제가 북방계였음을 감안한다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곤지왕자와 개로왕의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본까지의 무사한 행로를 위해 일종의 인질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미 개로왕의 부인은 임신중에 있었고 아이를 낳으면 돌려보내 줄것을 약조했으므로
    일본 서기는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배에 태워 백제로 다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 못 된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것을 기록한 서기에서는
    동성왕이 죽자 무령왕이 비로소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무령왕을 백제에 보낸 곤지 일행은 오사카에 도착해 일본에서
    15년간 머문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곤지는 백제에서 왜 왕실로 건너가 세력을 착실하게
    키워 치열한 권력투쟁끝에 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는데, 당시 곤지왕자의 왕실 가문
    성씨(王姓)가 바로 아스카베였다. 곤지의 후손들 역시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이후 후손들은 조상인 곤지를 기리기 위해 3000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었다. 그곳이 아스카베신사다.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의  원래의 이름은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다고 하는데
    일본 황실에서 직접 제사지내는 이른 바 ‘식내대사(式內大社)’라는 대규모의 천황가 소속
    신사였고 “곤지왕신사의 제신(祭神)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인 백제숙이의 조상인
    곤지 왕자다.” 라고 일본 왕실 사당에 관한 기록인 ‘신기지료(神祇志料)’에도 적혀있다.


    "사마"는 착실하게 성장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귀족들은 본국의 왕자로써 그를
    보호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동생이었던 동성왕의 급서(急逝)로 귀족들 간에는
    왕의 옹립을 싸고 한바탕 내홍을 겪었고 본국에도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일본
    세력의 도움으로 수많은 친위군과 함께 백제로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릉은 두가지를 확연하게 후세에 남겨주고 있는데 하나는 당시 문물의 선진국이던
    연나라, 즉 중국의 문물을 급격하게 도입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묘제가 양나라의 그것과
    흡사하고 특히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묘지석과 무덤을 지키는 짐승등이 그렇다.

     

     

    무령왕은 왕비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몇년이 흐른후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서

    합장으로 이 릉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왕은 어딘가에 가매장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합장을 할 당시에는 이미 백골이 된 왕의 유골에 옷을 입히고 치장을 했을 것이다.

     

    그 증거중의 하나가 왕비가 누웠던 곳의 팔찌가 나란한 반면 왕의 자리쪽에는 가슴부근에

    있어야 할 동경과 머리께 있어야 할 뒤꽂이가 함께 머리의 한쪽에 있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는 귀수(鬼獸)다.

    신라의 왕릉들 처럼 토우같은 사람의 형상대신 이런 귀수가 무덤을 지키게끔 배치된 것은

    백제가 중국의 문물을 상당한 수준까지 받아 들여 소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실이라고 하여 움푹 파이게 구성된 등잔감실이다.

    죽음의 세계로 갔지만 사람들은 무령왕 부처에 대하여 등잔을 배치하여 마지막 뚜껑을

    덮을때 밝음을 유지해 주었다는 안도감에 젖었을 것이다.

     

     

    왕의 뒤꽂이다. 얼핏 뒤꽂이 하면 여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예전에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머리를 길렀고 긴 머리는 뒤로 쪽을 짓거나 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상투는 조선시대에나 있었고 따라서 고대에는 뒤쪽으로 묶었을 것이다.

    그 곳에 금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뒤꽂이로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북방계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명이다. 환두대도는 고구려, 신라, 백제등

    한민족 계열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칼이다. 무령왕릉의 부장품인 이 환두대도는 환두부분에

    왕을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무령왕 재위시에는 일본계 귀족들이 득세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릉에서
    출토된 관의 재료가 일본에서 사는 금송(금송)이라는 것이다. 당시 금송은 일본에만
    있었고 수령 천년에 가까운 금송을 뗏목으로 만들어 공주까지 이송함으로써 본국 세력에
    대한 일본계 세력의 시위라고 보인다.

     

     

    옛 국립공주박물관은 지금은 새로 지어 고마나루 부근으로 이전을 하고 그 자리에는

    충남역사박물관이 들어 섰다.

    이곳에는 일본에서 가져다 심은 금송(金松)이 몇 그루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나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일본의 소나무보다 굉장히 단단하다. 기후의 차이로 일본보다 성장이

    느리지만 그 단단하기의 차이는 크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전투선을 부딪쳐서

    깨트리는 당파작전을 가끔 사용하는 것도 이 단단함에서 상당히 떨어지는 일본전함의 약점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진출한 백제의 귀족들은 섬왕, 즉 사마왕이 죽자 수령이 상당한 금송을 벌채했다.

    그리고 여러개를 묶어 바다를 건너 백제로 이송을 했다. 이 작업은 아마 상당기간이 걸렸고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이 금송으로 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금송은 잎에 금줄을 가지고 있다. 아마 금송이라는 이름은 이것 때문에 붙은 것일 것이다.

     

     

     

     

    무령왕릉의 가을은 이제 막 절정의 가쁜숨을 쉬고 있는 듯 하다.

    단풍이 아름답다. 나무 한 그루의 잎들에서 수많은 색을 내뿜고 있다.

    바라보다가 취기를 느낀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가끔씩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가 보다.

     

     

     

    주인을 모르는 왕릉의 하나인 6호분...

    그냥 6호분이라 불리는 이 왕릉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사신도는 북방계에서

    공통적으로 무덤속에 그리는 그림이다. 사자의 공간을 지켜주는 상상속의 동물들이다.

    좀더 백제의 역사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행하여지고 그 연구들이 성과를 거둔다면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도 가려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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