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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통신사의 인장
    여행기 2007. 12. 12. 17:16

    조선통신사의 인장


    조선이 개국한 후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까지 62번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이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通信使),회례사(回禮使)·통신관·경차관(敬差官) 등등으로
    그때의 목적에 따라 붙여졌다. 일본에 보내는 사절은 대부분 일본의 요청이 접수되어야
    보냈고 당시 일본인이 조선의 조정에 온 회수에 비하면 일본에 파견된 사절의 회수가
    턱없이 적은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외교에서 조선의 우위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은 물산의 유통이 막힌 섬이라는 특성상 무역을 통한 경제문제의 절박함이
    있었고 조선은 정치적 외교적 목적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행로, 한국브리테니커회사)


    양국간에 본격적인 외교목적의 통신사 파견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기 위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목적도
    이때부터 통신사에게 내려진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1636년에는 양국간의 외교를 터는 계기가 되었던 국서가 대마도주에 의해 개작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면 중단되었다가 그 해에 청나라의 칩입으로 일본의 침략 의도를 확인하기
    위한 외교적 필요에 의하여 파견되었다.


    통신사의 파견절차는 일본 바쿠후의 장군이 교체되면 통신사 요청 국서가 전해지고
    일본은 대마도주가 조선은 예조가 서로 협의하며 준비를 담당했다. 통신사의 일행은
    거의 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였고 통신사에 대한 접대는 대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 海遊錄〉에 따르면, 1719년(숙종 45)의 경우 통신사 일행의
    선도와 경호를 위해 쓰시마 군사 1,300명이 동원되었고, 쓰시마 섬에서 에도 사이에서
    직접 접대를 맡았던 다이묘[大名]는 33명이지만 그밖에 통신사행렬이 지나는 해로와
    육로에 인접한 수많은 지방의 다이묘들이 예하 민을 국역 부과형식으로 동원했는데
    그 수는 하루에 3,000명으로 방대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보아 통신사의 일본방문은
    일본의 국가적 행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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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충남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구, 국립공주박물관 자리에 있음)에 보관된
    조선 통신사의 공식 인장이다. 조선통신사 파견이 될때마다 바뀌었던듯 하고 따라서
    통신사의 임무가 끝이 나면 반납등의 절차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중에서

    그동안 보관되어 왔던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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