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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의 카운터펀치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7. 8. 13. 11:02

    <수필>

                           딸의 카운터펀치


                                                김   대  근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밸런타인데이는 이래저래 초콜릿을 많이 먹게 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너무 흔해진 탓인지 특정한 여자와 남자간의 고백이 아니라 그냥 의례적으로 안면이 있으니 준다는 식으로 변해버린 것 같아 마음 한 곁이 영 찝찝하다. 딸만 셋이니 와이프까지 하면 집에서만 네 명의 여자로부터 초콜릿 공세를 받아야 하고 회사에 출근하면 회사대로 여직원들이 남자직원이라면 가리지 않고 초콜릿을 한 상자씩 책상에 놓아두는 것이다.


      올해 밸런타인데이에는 와이프가 특별한 초콜릿을 선물했다. 높이 20센티쯤 되는 남폿불 등잔처럼 생긴 초콜릿 용기를 준 것이다. 검지손톱만한 초콜릿을 갖가지 색으로 입힌 것들이 가득 들어있고 앞면에는 조그만 손잡이 하나가 달려있는데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돌리면 4~5개의 초콜릿이 아래의 구멍을 통해서 쏟아지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초콜릿 자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크기도 제법 앙증맞아서 거실의 텔레비전 위에 딱하니 올려놓으니 아이들이 심심하면 100원 동전을 넣고 뽑아먹기를 즐기는 것이다. 안에 들어있는 작은 새알 같은 초콜릿이 어떤 때는 3개도, 4개도, 5개도 제 맘대로 나오니 아이들은 그 변화를 오히려 즐기는 듯하다. 와이프가 때 아닌 부업거리를 나에게 떠안긴 셈이 되었다.


      막내딸이 이 자판기의 고장을 알려 준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애초에 아이들 장난감  쯤으로 생각하여 신경이 무뎠는데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둘째딸이 항의를 하는 것이다. 고객관리를 좀 하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동전을 넣고 빼어먹는 소비자이고  자판기의 소유자는 아빠이므로 자신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고객이니 자판기가 고장이 났으면 빨리 수리를 해서 고객의 불편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니 할 말이 없다. 별 수 없이 공구를 챙겨서 분해를 하고 보니 그새 제법 되는 동전이 모여 있는 것이다. 100원짜리 동전이 마흔여섯 개니 사천육백원이나 되고 십 원짜리 동전이 11개니 110원이다. 환가의 차이가 10배나 나는 10원이 들어간 것에 대해서 따졌더니 그것은 소유자가 원천적으로 10원짜리가 들어갈 수 없도록 했어야지 소비자에게 따지면 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는 것이다.


      와이프의 말을 빌리자면 대학교 2학년인 큰딸이 장난삼아 10원 동전을 넣고 돌렸더니 100원을 넣었을 때와 같이 초콜릿이 우르르 쏟아졌고 몇 번 그 재미로움을 즐기다가 양심에 찔려 실토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막내가 그걸 이제 알았나며 자신은 한참 전부터 그리 했노라 오히려 언니를 타박 하더라는 것이다. 영악한 막내 녀석이다. 그래도 이런 가족공통의 화제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에 내심 흐뭇하다.


      돈 넣고 돌리는 부분을 분해하여보니 고장의 원인이 바로 10원짜리 동전 하나에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을 여러 개 모아놓고 보면 세파에 많이 시달린 동전은 가장자리가 둥그스름하게 되고 두께도 좀 얇아지는데 그런 낡고 얇은 동전하나가 플라스틱의 틈사이로 끼였고 그 위에 100원짜리 동전이 억지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손잡이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작은 부품들까지 완전하게 분해를 하고 나서야 불안정하게 자리 잡은 동전을 제거할 수 있었고 다시 역순으로 조립을 했는데 작동이 안 되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동전을 넣는 부위도 나름의 방향으로 세팅을 해야 하는 위치가 있는데 그저 조립만 했으니 될 리가 없다. 다시 분해를 한 다음에 방향과 위치를 잘 맞추고 조립을 했더니 작동이 부드럽고 정상적이다.


      형광색 포스트잇 한 장에 굵은 사인펜으로 “수리완료, 이용바람”이라고 적어 자판기의 유리부분에 붙이고 본래 있던 자리에 놓았다. 고등학생인 둘째가 대뜸 한마디 하는 것이다.


    “아빠! CEO수첩, 무지 비싼 거지?”
    충격을 받으면 부스러져 마사토로 되는 퍼석한 돌처럼 무른 성격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몇  년 전에 조그만 수첩하나를 몇 만원이나 주고 샀었다. 세계적인 스케쥴 관리 업체로 유명한 ‘프랭크린 플래너’라는 제품인데 해마다 바뀌는 속지도 여간 비싼 게 아니어서 껍데기만 계속 사용하고 속지는 문방구점에서 사다가 쓰는 것이다. 이 맹랑한 둘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수첩만 CEO면 뭐해. 정신이 CEO가 되어야지!”
    딸이 말하는 요지는 고객만족을 위해 CEO라면 당연이 포스트잇으로 적은 내용보다 훨씬 공경하게 해야 하고 그동안 불편하였던 것에 대한 사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딸의 말대로 아무리 가족이라도 고객이라면 당연히 고객으로서 대우를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끽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새로운 포스트잇 메모지에다가 다시 적었다. “수리완료!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자판기의 사태를 볼 때 서비스 정신도 모자랐지만 상품의 다양성이 부족한 부분과 지속적 홍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집안에서 하나뿐인 자판기이지만 투자를 좀해서 주기적으로 다른 상품을 좀 넣어 본다든가 용돈의 일부를 동전으로 준다던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실 자판기 안에 들어가는 초콜릿이야 얼마하지 않으니 1/3정도 남으면 미련 없이 새 상품으로 교체하고 오래된 것들은 자신들에게 홍보용으로 제공하라는 것이다.


      거의 30년을 월급쟁이로 세상을 살다보니 많은 직종과 여러 직급을 거쳐 부서장이 되었다. 기술파트도 오랫동안 거쳤고 생산파트도 경험했고 품질관리도 했다. 기술영업도 경험이 있어 나름대로 고객관리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생 둘째딸에게 카운터펀치를 정통으로 맞은 셈이다. 매일 아침 ‘플래너’를 펼치고 그날의 스케쥴을 적다가 보면 둘째딸로부터 얻어맞은 펀치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음~ CEO 정신……”
    나태한 월급쟁이가 가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계간 아람문학 2007년 여름호 수록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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