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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산선문을 찾아서(9)- 문경 봉암사
    기획여행기 2007. 6. 18. 18:02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9)- 문경 봉암사


    반디불의 똥꼬 기획특집1


    구산선문을 찾아서(9)


    문경 희양산문 봉암사를 찾아서

     

     


    1년에 딱 한번 세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절이 있다. 스님들의 수행을 위해 문을 꼭꼭 닫아 걸고
    있다가 부처님 오신 날인 4월 초파일에만 일반 신도들에게 속살을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모순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가르치신 본 뜻은
    인간의 평등, 더 나아가 우주 만물이 모두 평등함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면 부처님을
    마음에 모시는 누구나가 희양산 자락에 거(居)한 부처님께 언제던지 예배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면으로 보자면 신도들과 스님들간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곳은
    신도의 영역, 저곳은 스님의 영역을 따지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공부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산 선문의 흔적을 찾아 떠돌면서 북한에 있는 황해도 해주에 있다는 수미산문 광조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마지막으로 들리게 된 연유도 8군데의 절을 찾는데 몇년이 걸린것도 모두가
    희양산의 봉암사가 그 원인이었다.


    3년전 괴산부근의 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려서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온 이후로 해마다 벼르기만 할 뿐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부처님의 법이 꼭 봉암사에만 있는 것도 아님에도 봉암사를 가려고 한 것은 이왕에 시작한
    구산선문을 찾아서라는 포스트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어차피 황해도 해주에 있었다는 수광사는
    통일이 되어야 가능할 일이고  또 그 흔적이나마 남아있는지 확인도 안되므로 우선 갈 수 있는
    8곳은 다 가보아야 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올해 부처님 오신날은 며칠전부터 마음을 다진 끝에 "구산선문을 찾아서"의 마지막 숙제인
    봉암사로 향했다. 차를 길옆에 세우고 3KM를 걸어서 봉암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셔틀버스가 운행이 되는데 기다리는 줄이 족히 몇백미터는 되어 보인다. 눈 대중해
    짐작해도 1시간은 기다려야 겨우 버스를 탈 수 있을듯 하다. 그냥 걷기로 했는데 그곳에서
    5.2KM라는 거리를 걷고서야 봉암사에 도착을 했다.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가 창건하여 9산 선문중
    희양산문으로 당당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은 수행을 핑계삼아 문을 걸어 닫고 있어서
    오히려 인색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후 후삼국의 갈등으로 극락전만 남았다가 고려태조 18년에 전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다시 조선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의 병화를 당하여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에 와서야 금색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새로 건립하였다. 절터는
    오래된 고찰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으나 현대에 다시 지은 건물들로 인해 웅장함만 남고
    안온함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봉암사 선원은 신라후기 지증대사가 창건한 후 9산선문중 희양산문으로 개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봉암사를 결사(결사)도량으로 삼았고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등의
    20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그 결사도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70년부터 다시금
    수행에 뜻을 둔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1982년부터 조계종단에서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희양산 역시 등산이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 보물 제 169호 3층 석탑
    대웅전 앞에는 희양산의 당당함을 완성시키는 듯한 3층 석탑이 있다. 이중의 기단위에
    구성되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들과는 달리 이 탑은 단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이 비례와 균형의 조화에서 보기 드문
    수작일뿐 아니라 상륜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석탑 유산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격(寺格)이라는 세속적 욕심에 의해 새롭게 지어진 대웅보전의 위치보다 이 탑이
    있는 위치가 봉암사와 희양산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 탑은 보물 제 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보물 제 137호 지증대사 적조탑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 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여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이고 지대석 너비는 2.28m의 당당한 탑으로 전체적으로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 보물 제 138호 지증대사 적조탑비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 원년(서기 924년)에
    세운 것이며 드물게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부는 한 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 형으로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
    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절정기의 화려함이 보인다.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승려로 당시 83세였던
    혜강이 글을 쓰고 새겼다고 한다. 비의 전체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이다.

     

     

    ★ 지방문화재 극락전

    특이한 극락전이다. 지붕을 받친 기둥으로 회랑이 구성되어 있는 극락전인데 목탑양식으로 지어져

    탑이면서 법당이기도 한 건물이다. 

     

     

     

     

      

    ★마애보살 좌상 (지방문화재)
    봉암사 앞을 뱀처럼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뛰어난 경치에 놀라기도 하고
    이런 좋은 환경적 사회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수행자들의 욕심스러움에 섭섭하기도 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로인해 자연의 깨끗함이 지켜졌으니 그도 좋은 일이다 싶기도 하다.


    제법 올라가니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고 그 한곁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사실 봉암사
    라는 외형적인 모습보다도 이 보살상이 더 보고 싶었다.


    조각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높이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 모양의 장엄물 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하게 처리 하였다.  보관의
    중앙에는 꽃 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보믐 사람이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주먹만한 돌을 들고 보살상 앞의 너른 바위를 치니 신기하게도
    목탁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도 해보자 싶어서 돌을 받아들고 이곳저곳 두드려 보았는데
    A4 용지 크기의 부분에서만 목탁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부에 공간이 있는듯
    보였다.

     

     

     바닷가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뜨악~한 몽둥이들 들이댄 해당화가 국토의 거의 중심부인 산골짝에 피었다.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해당화가 굳이 바닷가나 섬마을에 피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나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인연이 서로 이어진다면 장소나 시간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연꽃은 진흙을 기반으로 꽃을 피울때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다. 맑은 물이나 바닥에 진흙이 없다면 연이 살지도

    연꽃으로 피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사바로 돌아왔다.

     

    조금의 틈도 없이 수많은 번민들이 들락날락 거리지만 살아가는 양념이라 생각하면 내가 사는 이 진흙밭도

    그런대로 좋은 곳이다. 앞으로는 찾지 않을 것이다. 굳이 오지 말라는 곳이니 구태여 찾고 싶지는 않다.

    부처님은 내 주변에도 수없이 많으니 그곳이 아니더라도 해당화처럼 인연있는 아름다운 곳을 찾으면 될일이다.

     

    이로써 반디불의 똥꼬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했던 기획특집 "구산선문을 찾아서"를 일단은 마친다.

    황해도에 있는 수미산문 광조사에 대한 탐방은 통일이 이루어진 후로 미루어야 겠기에 구태여 "일단은"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마치는 것이다. 하루빨리 찾아볼 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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