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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사, 2박 3일간의 소회
    이런저런 이야기 2007. 2. 27. 19:03

     

                    금산사, 2박 3일간의 소회

     

      주5일 근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주일 중에서 가장 바쁜 날이 목요일이 되었다. 너 나 없이 주말을 위해서 움직이다보니 자연히 주말을 앞둔 금요일 보다는 목요일이 가장 바빠진 것이다. 유난히 업체로부터 전화도 많이 올뿐 아니라 다음 주 업무를 위한 각종 회위가 금요일에 몰려 있는 편이니 책상머리에서 정리해야할 일들이 목요일에 몰려있게 되는 것이다. 한참 일에 빠져서 허덕대고 있는데 책상 한 곁에 밀어 둔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진동으로 알려준다. 짧은 진동은 문자메시지, 긴 진동은 전화임을 터득한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금산사 템플스테이 참석해보지 않으실래요?”

    바쁜 몇 가지 업무를 처리 하느라 한참이나 지나서 확인한 문자메시지는 와이프가 보낸 문자였다. 마땅히 주말계획이 없었던 터에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접수했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2박 3일이라는 긴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오후 5시까지 가야 한다고 하니 마음이 더 바빠질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금요일의 절반쯤은 근무를 하지 못할 터이니 그 일까지 미리 해두어야 할 것이다. ‘짬밥’이라는 것이 있는데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먹는 밥을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다. 결국 ‘짬밥’의 차이는 직장생활의 경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기까지 한다. 그 오랜 ‘짬밥’의 경험으로 보아서 금요일 오후에 회사를 쉰다는 것은 윗사람에게 눈총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이 될 터이다. 금산사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는 또 다른 번민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다른 회사보다 길었던 설날 휴무를 지난 탓에 쌓여있는 일이 자꾸 가기로 한 결정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결국 금요일 오후에 있었던 팀장회의는 부하직원을 대신 들여보내고 소위 ‘농땡이’라는 것을 치기로 하고 회사를 빠져 나왔다.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마음이 들떠있었다. 마치 몇 끼쯤 굶고 진한 커피를 몇 잔 연거푸 마셨을 때처럼 몽롱한 마음이 되었다. 얼마 만인가?. 절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20년 만에 다시 해보는 일이다. 20대에 불교청년회 활동을 한다고 다닐 때 자주 회원들과 더불어 이곳저곳으로 철야정진을 다녔다. 그곳에서 와이프를 만났다. 평생을 두고 도반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했지만 사람이 산다는 문제가 그리 녹녹하지 않아서였는지 그저 동행자의 역할만 해줄 뿐 도반으로서의 역할은 못해주고 있다. 동행자의 역할도 변변히 못해주고 있으니 크고 깊은 업을 스스로 쌓고 있는 것일 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20년을 한방을 쓰는 사이면서도 마음에 상처를 준 일도 많은 것 같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지나온 일들이 마음에 다시금 영상으로 투영되는 것은 아마도 연륜이라는 내공(內功)이 추억을 쟁였다가 이제 반감기에 들어 서서히 도로 내어 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천명(知天命)의 세계로 가는 문고리를 잡고서야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의 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나이가 되니 마음이 착잡하다. 생각이 많아 졌다.


     「그래- 이번 금산사 행은 생각 없이 지내보자.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금산사 산문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생각을 굳혔다. 그냥 스케쥴이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1년 365일 매일 아침 빠지지 않던 면도도 하지 말고, 늘 하던 것처럼 스치는 작은 생각들을 메모해두는 일도 하지 말고, 자투리 시간이면 늘 잡던 책도 잊어버리고 지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도 산문밖에 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찰들은 어디건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계곡이 일품이다. 통도사가 그렇고 해인사도 그렇고 송광사도 그렇다. 부티나는 고급승용차들이 가끔 그 길을 휑하니 달려서 절 마당까지 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대개 그 절의 1급 신도일 경우가 많다. 절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신도의 급수는 보시금의 차이로 매겨질 것이다. 몸을 굽혀 마룻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는 행위만이 하심(下心)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속세에서 담아온 온갖 부정한 마음을 씻으며 몇 분간 걸어보는 것도 큰 하심의 공부가 될 터이다. 마침 껍데기 육신을 장악하고 있던 목감기가 금산사 종무소 앞의 주차장의 환영을 보이며 유혹을 했지만 걷기로 했다.


     “카메라는 안 챙기우?”

    차문을 잠그는 빈손을 보며 의아한 눈으로 와이프가 물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라네. 생각 없이 지내다 가고 싶어”


      사실 우리부부에게 오늘같이 절에서 지내는 일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니 크다면 상당히 큰 이벤트다. ‘인생은 이벤트다’라는 말처럼 살아가는 매일 매일이 이벤트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같은 일은 무척 크게 남을 그런 일인 것이다. 컴퓨터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남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여행을 가게 되면 한곳에서만 수 십장의 사진을 찍고 메모하고 다시 글로 옮기는 일을 반복해왔다. 그러니 이번과 같은 큰 이벤트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와이프로서는 당연히 의아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은 그러고 싶었다. 보는 것, 행하는 것들을 기록하려면 늘 그 행위와 일에 대하여 생각을 해야만 할 것이고 그런 것이 싫었던 것이다.


      종무소에서 옷을 받아 들었다. 주는 분은 사이즈 100이면 될 것 같다고 했지만 내 사이즈를 누구보다 잘 아는 와이프는 95를 고집했다. 사실 100이라는 사이즈의 옷을 받았으면 분명 팔이 좀 길었을 테고 바지도 상당히 길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몇 개의 콤플렉스들 중에서 50이 된 오늘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키의 문제다. 0.5센티미터만 더 컸더라면 그래도 165를 넘겨보았을 텐데 이 165라는 숫자는 나에게는 너무 거대한 벽 이였다. 일견 나와 같은 세대에서 작은 축에 속할지 몰라도 콤플렉스까지 갈게 무엇이 있겠냐 하겠지만 내 유년과 청소년기에는 늘 키로 인한 좌절이 유달리 많았던 탓이기도 하다. 반장을 뽑을 때도 언제나 뒤쪽에 앉은 아이들에게 지명의 손가락이 향했고 제일 앞줄 아니면 겨우 두 번째 줄에 앉은 나는 그럴 때마다 좌절을 느끼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무협지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를 통해 느낀 것이 키가 작으면 걸음이라도 빨라야 되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모래주머니를 정강이에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점점 무게를 늘려서 나중에는 납을 넣고 다녔다. 축지법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 기행은 2년간 지속되었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만 두었는데 짧은 다리의 넓은 보폭은 그때 생긴 습관이 되어 데이트 할 때마다 잔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래서 늘 한복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한복이라는 게 좀 듬직한 체형에 우뚝한 사람이 입어야 어울려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체구로 큰 한복을 입으면 그야말로 볼썽사나워 지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혼자 왔더라면 숫기가 다소 부족한 나는 주는 대로 입었을 것이다. 늘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늘 챙겨주지 못해서 탈이라는 것이다. 빚만 쌓고 있는 중이다.


      금산사는 서너 번 왔었다. 그때마다 대숲을 지나 이어진 후원으로 가는 자그마한 대문에 늘 눈이 갔다. 항상 출입금지의 빨간 글자에 막혔던 곳이였는데 내 손으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마음에는 작은 떨림이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낙엽이 내는 파문처럼 와 닿았다. 나는 대숲을 좋아한다. 댓 닢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귓속을 기분 좋게 간지럽게 하는 느낌도 느낌이지만 바람이 불 때 대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딪히며 서로를 확인하는 따닥~ 이는 소리가 늘 시원함으로 가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서래선원(西來禪院)의 마루에 앉아 있으니 선경이 따로 없다. 세속의 일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덕지덕지 더께가 앉은 마음이 선원 앞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자꾸 씻겨갔다. 그때마다 마음의 한쪽이 시원해진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인가 보다. 이 신선한 곳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 먹는 일이라니. 절에서 공양시간 준수는 철칙임을 잘 안다. 정해진 시간에는 누가 와도 먹을 것을 주지만 벗어난 시간에는 누가 와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이곳에서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이 시간을 놓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집에서는 출출하면 아이들을 부추겨서 라면을 끓이게 하고 몇 젓가락 덤을 놓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 시간을 놓치면 내일 아침까지는 주린 창자가 내 인내의 폭을 시험하려 들 것이다. 절밥을 먹는 일은 흔하다. 부부가 불교를 신봉하니 자연 여행지의 대부분은 절이 있는 터이고 공양시간에 맞추어 공양간에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공양간에 서니 그 소회가 남다르다. 그리고 저녁예불이 이어진다. 보통 퇴근시간이 6시에서 7시 사이인지라 6시 30분이면 듣던 채널을 돌려서 불교방송으로 맞추면 저녁예불을 방송한다. 20년 넘게 나에게 있어서 신행이란 이렇게 불교방송을 가끔 듣는 것, 불교신문을 구독하는 것, 가끔 절을 찾아 여행을 가는 것, 초파일에 3사 순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참여하는 저녁예불은 자꾸 지심귀명례부터 엇박자를 내었다. 예불이라는 행위가 부처님 앞에서 대중들이 목소리를 맞추어 공양하는 것도 좋은 일일 텐데 자꾸 엇박자가 되니 그냥 입을 닫고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하기는 지독한 목감기가 자꾸 입을 닫게 만들기도 했다. 예불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고개를 젖히니 북두칠성이 눈앞 1미터쯤으로 하강을 했다. 내일은 삼성각의 칠성님께 치성이라도 드려볼까?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더니 다음날 밤에는 날씨가 흐려서 북두칠성이 숨어버렸다. 분명히 칠성님이 삐진 듯하다. 다시 한번 다니러 가야겠다. 초코파이 한통이라도 올려야겠다.


      「졸졸졸~」,「쏴아아~」

    조용한 산사의 밤에 개울물 소리와 댓 닢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들이 창호지의 울림을 통해 입정해있는 정신사이로 자꾸 비집고 들어왔다. 주지스님의 상좌인 ‘보하’스님의 지도로 참선에 들었다. ‘무(無)’라는 화두를 주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마음은 산문 밖으로 달아났다. 아차! 싶어 다시 잡아다 놓지만 이내 또 뒷산으로 달아났다. 들어올 때 뒷산에 차나무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정신이란 놈이 궁금했는지 하필이면 이런 시간에 그곳으로 간 것이다. 다시 아차! 싶어 잡아다 놓으면 달아나고 잡아다 놓으면 달아난다. 머물러 있는 시간 10초에 도망간 시간이 10분쯤 되니 끝나고 나서 가만히 암산을 해보니 40분 참선에 화두 잡은 시간은 불과 40초에 불과하다. 뜨거운 라면 가락을 후~후~ 불어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너무 비경제적이다 싶다. 갑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어닥친다. 지극한 둔재(鈍才)인 자신이 너무 미워진다.


      너무 오랜만에 반가부좌를 한 탓인지 허벅지가 뻐근하다. 젊은 날 밤새워 정진해도 가뿐하던 때도 있었건만 역시 반환점을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몇 배 지치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 이것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생활에는 열심이었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을 찾는 일에는 그동안 무척 게을렀다는 반증일 것이다. 방선(放禪)의 죽비소리 세 번이 어찌 그리 반가웠던지 하마터면 대소(大笑)를 터트릴 뻔 했다. 그리고 스님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따스한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화의 관점은 역시 나이에 따라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죽음이라는 주제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나누어 졌다.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 ‘죽음’이다. 유형의 것이던 무형의 것이던 자신이 가졌던 무엇이라도 놓고 가야하는 것 또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게시판에 자주 내붙는 알림이 「oo부 xxx 대리 아들 돌잔치」같은 것이나 「oo팀 ooo 과장 모친 칠순잔치」등인데 이런 때는 가거나 혹은 가지 않거나 간에 얼마간의 돈이 들은 봉투를 내어놓게 된다. 이른바 축하한다는 의미인데 이런 때마다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은 죽음으로 출발을 하는 것인데 돌을 축하 한다는 것은 태어나면서 받아 온 자신의 삶에서 일 년을 감(減)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고 살아 갈 날이 일 년이 줄었다는 것을 축하하며 돈까지 내어야 하니 어찌 보면 모순이 아니겠는가? 칠순도 마찬가지 이다. 오랫동안 건강히 살아있음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실상 따지고 보면 자신의 삶의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었음을 축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사실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긴 하다. 돌이란 태어나 일 년 동안 부모에게 즐거움과 해맑은 미소와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건강한 웃음을 주었으니 고맙다는 뜻으로 마련한 잔치로 이해하기로 하는 것이다. 칠순잔치도 뼈에 살가죽이 붙도록 늙어 가시면서도 자식걱정에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죽음’이란 평생을 이야기해도 모자라는 이야기다. 대중들이란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서로 미루다가 일단 이야기가 고삐를 물면 서로 하려고 한다. 게다가 僧과 俗의 극단에 있는 사람끼리의 대화이니 더욱 어려울 밖에 없다. 이번 기수가 54기라고 하는데 올해 60 되신 분부터 8살짜리 꼬마까지 다양한 연령이 한 자리에 있다가 보니 대화의 고삐도 여러 갈래다. 그래도 보하스님은 대중 이끎이 깔끔하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산문의 법칙이니 모두의 잠자리를 위해 자리를 파했다.


      9시 30분. 불을 끄고 누워있으니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이러다가 잠이나 들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집에서는 언제나 12시나 새벽 1시가 되어야 잠이 든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으로 대개의 저녁시간을 사용하는 것인데 아침에는 늘 단 5분을 더 자려고 안간힘을 쓴다. 6시에 핸드폰이 모닝콜을 울리면 다시 6시 45분에 알람을 맞추고 다시 잠이 든다. 6시 45분이 되어 다시 요란한 음악의 알람이 울리면 다시 알람을 10분후로 맞추고 또 꿀맛 같은 단잠에 빠진다. 항상 6시 55분은 낙동강 최후의 보루선이 되는 시각이다. 이때를 놓치면 영락없이 지각이 되는 터이기 때문이다. 부장쯤 되니 출퇴근 시간이 그리 목매지 않아도 되겠지만 30년 직장생활의 습관이라는 것이 이제는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조정하는 본능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일은 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옷과 프로그램을 받았을 때 ‘새벽예불’칸에 부기된 ‘자유’라는 단어는 내심 반가웠고 편하게 있다가 가리라는 처음의 목적대로 게으름도 좀 부리리라 했지만 차 마시는 시간을 끝내면서 보하스님이 맡겨버린 입승(立僧)의 직책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입승(立僧)이란 반장과 같은 것인데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새벽예불을 이끄는 것이니 이 산골까지 와서도 핸드폰의 알람을 오전 3시로 설정해야만 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학창시절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반장은 어디 먼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내가 살아오는 내내 키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주에 말년 운에 벼슬 운이 있다고 하더니만 마흔의 후반에 와서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학년장을 맡아 겨우 반장에 대한 한을 풀 수 있었다. 이 산골에 와서 좀 게으름을 피우려니 보하스님의 손짓한번에 게으름의 꿈이 사그라져 버린 것이다.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귀에 익은 음악소리에 얼핏 눈을 떴다. 핸드폰이 울고 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인가 보다. 나는 알람을 다시 6시 45분으로 조정하고 다시 누었다가 아득히 들리는 목탁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내가 입승이지. 다른 사람들을 깨워야 되는 거지. 목탁소리가 가까이 들렸다가 다시 멀어져 갔다.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운 20분이 지나자 대부분 준비가 되었다. 첫날이어서 일까?.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심지어서는 8살짜리 꼬마까지도 법당을 향하는 새벽길의 도반이 되었다. 도반이란 의미가 살갑게 다가왔다. 저녁예불과는 다르게 아침예불은 두 번째여서인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스님들의 예불문에서 지역적 특색도 찾아 낸 것이다. 고향이 경상도이다 보니 경상도 절에 다닐 기회가 더 많았고 그 예불문에 익어 있던 나에게 지역적 차이가 또렷이 다가 온 것이다. “지-심-귀명례-”와 “지-심-귀-명-례-”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 예불 때보다 훨씬 적응이 되었다. 나는 예불을 할 때 ‘서건동진 급아해동’의 구절에서 늘 내가 한국인임을 다시 느끼고는 한다. 중국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포장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 불교를 우리에게 맞는 우리만의 불교로 꿈꾸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꿈을 꾸는 것일까? 다시 서래선원으로 돌아오는 길 극락교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이런 소리를 남기면서 사하촌(寺下村)으로 흘러갔다. “미친놈~ 미친놈~”


      두 번째 참선이 시작되었다. 참선을 하기 전에 포행부터 했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몇 바퀴 돌았다. 포행은 참선의 중간 중간에 다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또 시작 전에 준비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 오늘도 화두는 무(無)였다. 간결하지만 어려운 화두다. 가만히 앉았으니 어제보다 마음이 머무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자꾸만 논리적 분석이 앞서려 한다. 그도 잠깐일 뿐 자꾸 도망가는 마음을 찾아 왔다가는 놓치기를 계속하다가 죽비소리 3번에 풀려났다. 23년 전에 부산 영주암의 조정관 스님에게 5계를 받고 법명과 화두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화두가 ‘이뭣고’ 이었는데 23년간 앉은 곰팡이로 원형조차 사라지고 없다. 법명은 ‘자명(自明)’을 주셨는데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에서 취하셨다니 나에게는 과분한 법명이 아닐 수 없다. 돼지발에 편자를 끼워주신 셈이다. 큰 스님께 송구함의 절을 올린다.


      운력이 있었다. 절에서 사실 처음 해 보는 것이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말처럼 불가만큼 생산을 강조하는 종교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운력은 쉽게 말하면 일을 하는 시간이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게 맑은 공기를 호흡하게 하고 온몸 운동 시키게도 하는 일이니 일석이조 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 특히 조선시대를 거치며 불교는 나라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력갱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승려는 탐관오리의 토색의 대상이기도 했다. 절에서 종이를 만들어 수시로 상납하여야 했고 사고(史庫)부근에는 승군을 만들어 지키게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절에서는 스님들이 스스로 경작을 해야만 했고 소소한 물품도 스스로 구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특히 생산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나름대로 하나씩의 소임을 맡았다. 나는 경기도에서 오신 거사님과 한 짝이 되어 스님의 처소 청소에 들어갔다. 청소라고 해야 무슨 걸레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일이였다. 진행을 하는 일체향님이 던진 한마디가 봄날 얼었던 강의 두꺼운 얼음이 쩡하고 갈라지는 느낌으로 왔다.

      “마당 잘 쓰는 방법을 아세요?”

    그냥 빗자루로 깨끗이 쓸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잘 쓰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의아심이 들었다.

      “빗자루로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한분이 먼저 가시고 다음분이 그 자리를 다시 그렇게 하시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답니다.”

    마당 쓰는 일을 그린다는 표현은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말이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에는 낙엽도 그대로고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몇 알도 남아 있었다. 나는 마당을 쓴다는 것은 티끌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아니라 티끌조차도 마당의 구성요소로 보아 조금의 위치만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마당에 무늬를 만들어 놓으니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미건조한 흙 마당이 갑자기 살아나 바람을 부르고 소리를 청하며, 그래서 스스로 만들어낸 물결 같이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는 마당청소는 아마 앞으로도 자주 해보고 싶을 것이다.


      오늘 아침의 차 나눔 시간은 일감스님이 자리해 주셨다. 환경이라는 것은 비단 자연과 사람의 관계만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이 달라졌으므로 사람들에게는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끌어 가는 쪽과 이끌려 가는 쪽으로 나누어진 이런 관계에서 이끌어 가는 쪽의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해진다. 노련했다. 나도 세상살이 50년이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노련하게 대중의 마음을 용해시켜가는 과정이 참 노련했다는 표현으로 다소 부족한 감을 느낀다. 나중에 걸망~카페를 통해 안 일이지만 외국에서도 포교를 하셨고 해인사에서도 포교국장 소임을 맡으셨다고 하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갑자기 무협소설에서 많이 쓰이는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감스님은 사람을 다루는 고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방면으로는 최소 1甲子의 공력이 몸속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심원암으로의 산책이 있는 관계로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차 나눔 시간을 끝냈다. 사실 차늘 나눈다는 것보다는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마주보며 차를 같이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런 시간은 정보소통의 시간이다. 스님은 스님대로 각자에게 일부러 말을 걸며 각자의 성향을 파악할 것이다. 대중의 입장도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경청하며 스님에 대한 나름의 정보와 話者에 대한 정보 또 한 얻는 것이다. 가족 간에 가장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하고 생각되었다. 문득 이런 시간을 가정에서 자주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 아이들과 와이프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나누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산 아래로 내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런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져야겠다.


      심원암으로 오르는 길의 백미는 역시 아래에 새로 지은 심원암을 지나 만나는 대숲이다. 조릿대가 터널을 이룬 이 짧은 길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수년전에 모악산 등산을 하면서도 이 길을 지났는데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은 모악산의 유일한 풍경이다. 모악산은 산정에 방송국의 송신시설이 있어서 정상을 밟을 수 없는 곳이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작년 봄에 모악산 등반에서 건진 탈고하지 못한 졸시(卒詩) 한 수 올리는 것으로 심원암 다녀온 이야기를 대신 하려고 한다.


            모악산(母岳山) 에서


                                     김 대 근


     모악산 심원암 뒷길에

     그림자 두개가

     걷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파란하늘의 점처럼 빨간 감이 된

     나무 밑으로 말입니다...



     조릿대 잎사귀가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왔구려!

     내가 말했습니다.

     이곳에는 처음이라고 말입니다.



     댓닢들 부비는 소리 속으로

     댓닢이 토해내는 햇살 속으로

     아가미 헤집는 물살처럼 바람이 부는

     활엽수의 사이로 걸으며 되뇌었습니다.

     이곳에는 처음이라고 말입니다.



     한숨 잠깐 돌리려고

     기대선 소나무의 등걸에

     파란 이끼가 말했습니다.

     언제 오느냐고 말입니다.



     다시금 조릿대 터널을 뚫으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지요…, 미생전 윤회의 틀 속에서

     어쩌면 왔다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맞습니다.

     온 때는 알아도 갈 때를 모르는 우리 …

     또 다른 우주에서 보면

     현미경 고배율로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모 ․ 악 ․ 산

     모악산 정수리 빤히 보이는 헬기장

     열십자 테두리에 앉아

     찌~~잉  찌~~잉, 산이 우는 소리 듣다가

     사람 형상으로 찾아온 내가 부끄러워

     그냥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모악정으로 내려오는 기인 계단에서

     下心 또한 어렵다는 진리를 깨우칩니다.

     모악산의 온 갓 것들이

     모두 한마디씩 거들어서

     몇 겁을 쌓아논 꺼풀들을 벗겨냅니다.



     다만

     금산사 미륵불만 말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말이 없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바루공양이 있었다. 보하스님이 지도를 해주셨는데 엄격한 선방의 바루공양에 비하여는 약식이었지만 생각 없이 먹는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먹는 문제를 보는 종교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지금은 대학에 들어간 큰 아이를 한참 키울 때의 일인데 보낸 유치원의 원장이 기독교를 신봉하는 분이였다. 나는 종교에 대하여는 다소 자유스러운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터라 아이들에게 부모가 신봉하는 불교를 굳이 전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중에 커서 성인이 된 다음에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고 늘 생각해서 아이들이 성경학교를 간다하면 흔쾌히 허락을 하고 어떤 해는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루는 식탁에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려니 하는데 와이프가 아이에게 반문하는 것이다. “아빠가 열심히 일하셔서 우리들이 먹고 사는 것인데~ 감사를 하려면 아빠에게 해야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셨데. 아빠는 그냥 하느님이 만드신 거 가져오는 거래.”


      원초적인 것에만 집착한 결과이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치며 사는 것이다. 불교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수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먹는 먹거리의 과정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더불어 잘 사는 첫걸음은 서로에게 감사하는 일이다. 매사를 원인에만 집착하면 서로에게 감사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정신 바탕을 가진 미국과 이라크가 서로 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사람에 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역할이란 절대적이다. 물론 좋은 역할도 있을 테고 나쁜 역할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 역시도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역할과 나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선은 감사할 일이다. 바루공양은 그 고마움을 체험하는 일이다. 농민이 흘린 피와 땀을 헛되이 흘려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사실 속가의 생활에서 밥 먹는 행위는 대인관계의 핵이다. 동료들과도 점심을 먹을 때나 빙 둘러 앉아서 마침내 교류를 나눈다. 집에서도 모든 식구들이 모여 둘러앉는 저녁상 앞이 서로의 교감을 나누는 중요한 시간이다. 그러나 바루공양은 먹는다는 행위도 중요한 수행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집에서 식사할 때 밥그릇에 물을 부어 먹는 것을 즐기는데 그럴 때마다 딸아이들은 물 컵을 두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핀잔이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내가 부모로부터 배워온 습관인 것인데 요즈음 아이들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을 물로 씻어서 다시 먹으라고 하니 어린 아이들은 도무지 먹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회사에서 별 할일이 없이 사무실에서 편히 지낸 날은 그다지 식욕을 느끼지 않아서 식기에다 밥을 좀 적게 담으면 왜 그렇게 적게 드시냐고 부하직원이 묻는다. “한 일이 별로 없어서~”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지만 반찬은 자주 남기게 된다. 나뿐만이 아니고 모든 직원들이 잔반통에 버리는 양이 상당하다. 나부터 바꾸어야겠다고 다짐 했지만 이글을 적는 오늘도 몇 점을 반찬을 잔반통에 밀어 넣었다. 우매한 중생이란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오후 일과는 금산사에 상주하는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문화재를 순례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경내에 있는 나무들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특히 벚나무에 대한 인식이 나와 통하는 바 있어서 그의 벚나무 론을 들으니 가슴이 후련하다. 아닌게아니라 요즈음 우리나라 산천은 벚나무 공해가 심각하다. 지방 자치단체들이 앞 다투어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생각하지 않고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어대는 통에 요즈음 전국 어디를 가거나 가로수는 온통 벚나무들이다. 벚나무는 굉장히 비경제적 수목인데 흔한 나무젓가락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땔감으로나 겨우 쓰일 수 있을 뿐으로 일 연중에 단 며칠 화려한 꽃을 보자고 너도 나도 앞 다투어 심어대는 것은 잘못이다. 대구는 능금나무를 청도는 감나무를 아산은 은행나무를 심는 다던가 뭔가 남다른 가로수를 심어야 하는데 너무 천편일률적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일홍으로 알고 있는 배롱나무도 경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할아버지 산소에서 이웃한 다른 산소에 멋진 배롱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어서 산소에 갈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언젠가 할아버지 산소에도 배롱나무 한 그루 심어드리리라 다짐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해설들이야 금산사 홈페이지를 클릭하는 작은 수고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해설사의 나무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이전 금산사행의 추억 배낭에 쟁여본다.


      산사에서는 유난히 밤이 빨리 찾아온다. 아마도 도시에 비해 절대 부족한 광원(光源) 숫자만이 그 원인은 아닐 것이다. 새벽을 일찍 열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저녁 공양을 위해 공양간으로 가는 길에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밤에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미륵전 오른쪽 어깨에는 모악산 정상의 안테나 타워의 붉은 빛이 연신 깜빡였다. 저녁예불을 위해서 법당에 앉아 범종숫자를 부질없이 세었다. 결국 그마저도 다른 생각이 틈을 파고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세 번째 예불은 적응이 되어 훨씬 수월했다. 특히 길게 빼는 특유의 박자에도 적응이 된 것이다. 예불을 마치고 극락교를 건널 때 저녁 예불로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왠지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밤이다. 틀에 매여 사는 생활이 지루할 듯 했는데 의외로 너무 순식간에 지나 가버린 듯하다. 하긴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는 짜여진 시간표도 벌써 30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이 순간 생각하니 그 3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더 아쉽고 가지지 못한 비단이 더 고와보인다고 했던가?. 지나간 모든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마지막 밤이라서 인지 스님과의 대화시간을 길게 잡아 놓았다. 오늘은 1박 2일 코스로 오신 몇 분이 합류한 관계로 인원은 좀 더 늘어 있었다. 서울에서 오신 한 분과 천안에서 오신 두 분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일감스님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의 소유자다. 과묵해 보이는데다가 늦게 합류한 터라 서먹한 사람들도 금방 마음을 열어 보였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단정 짓지 않는 것, 그날 일감스님의 가장 강조점 이였다. 또 다른 강조점이 있었는데 내가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이란 한시도 쉬지 않고 이것과 저것의 문명한 구분지음을 강요하고 있다. 가졌다와 그렇지 못하다, 잘났다와 그렇지 못하다, 내 편 이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 내 것이다 와 네 것이다 등등…. 수많은 선들을 그으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마주해오는 나쁜 일들 중에서 좋은 것을, 좋은 일중에서 나쁜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지혜가 되리라. 좋은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설법전 바닥에 몸을 누이고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핸드폰이 새벽 3시임을 알리며 온 몸을 부르르 떤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진동으로 해 놓으면서 혹시 듣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자연스레 눈이 뜨여졌다. 가만히 일어나 도량석의 목탁소리의 방향을 추적한다. 명부전쯤을 지나고 있다. 극락교를 건넜다. 서래선원 앞마당을 목탁소리가 잠시 채웠다가 파도처럼 다시 가람의 앞마당으로 밀려갔다. 일어나 불을 밝히고 사람들을 깨웠다. 내외하는 여자분들 방을 두드려 그들도 깨웠다. 세수를 하고 복장을 가다듬고 죽비를 손에 들고 마당에 서니 오늘은 별이 모두 사라졌다. 하늘이 흐려진 것이다. 첫날 삼성각의 칠성님께 문안을 안했다고 삐졌나보다. 오늘은 아이들이 빠졌다. 하긴 지난 날 낮에 무리를 했으니 그럴 만하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장한 아이들이다. 마지막 예불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침공양 후 돌아와 잠시 주어진 휴식시간에 너, 나 할 것 없이 베게를 베고 누웠다. 7시 30분에 운력이 있었지만 모두들 곯아 떨어져버린 모습을 보고 일체향님이 배려를 하셨는가 보다. 아홉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음 일정표대로 움직였다. 108염주 꿰기는 1배후에 한 알씩 염주를 끼워가는 것이다. 여태껏 돈을 주고 사거나 주는 것을 받기만 했었다. 어릴 때는 할머니가 채마밭 도랑에 심어 거둔 율무로 염주를 만드셨는데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그마한 단주를 만들어 손목에 채워주시곤 했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터트려 버리곤 했었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를 큰집에 맡기고 재가했다가 다시 돌아오신 할머니는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으로 사셨고 아버지는 용서에 인색했다. 몇 됫박 소출의 염주는 모두 108염주로 만들어져서 할머니가 다니던 절의 불단에 바쳐졌다. 할머니는 동백기름으로 늘 머리를 다듬으셨는데 할머니 돌아가신지 십년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어느 날 마당에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으시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할머니를 용서했다. 지난 추석 때 아버지는 나와 와이프를 불러서는 손목에 차는 단주를 하나씩 주셨다. 동네 약장사가 알루미나가 좋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알갱이들을 비싸게 주고 사서 직접 단주를 꿰신 것이다. 절 한번과 ‘관세음보살’의 명호 한 번, 염주 한 알이 그렇게 꿰어졌다. 염주 한 알에 마음이 하나씩 담긴 것이다. 어떤 고급 재료의 염주들 보다 내 손으로 꿰어 만든 이것이야 말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감문을 쓰는 시간이다. 머릿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글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받아든 종이의 색깔보다 두어 배쯤 하얗게 머리가 비어갔다. 대충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적다 보니 배분을 잘 못한 탓으로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급하게 뒷부분을 마무리하고 나니 글이 꼭 가분수가 되어 버린 꼴이다. 몇 자 더 적을까 하다가 그래 보았자 읽는 사람에게 혼란만 줄 것 같아서 얼른 덮고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일감스님이 카메라로 매화 꽃봉오리를 접사로 찍는 중이다. 문득 어제하고 달라진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매화꽃 가까이 갔다가 속으로 ‘어리석은~’하고 피식 웃었다. 꽃이 피는 자연현상은 디지털이 아니고 아날로그인데 불과 하룻밤 사이의 변화를 보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말이다. 그래도 매화는 봉오리가 봉긋해져서 터질 듯하다.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처럼 뽀얀 속살을 겨우 일 푼쯤 내어 민 모습이다. 아마도 몇 일간의 햇살이 더 간지럽혀야 마지못해 꽃을 피워 낼 것이다. 벙싯거리는 꽃봉오리에 눈을 가까이 갖다 대는데 카메라의 시선이 동시에 느껴진다. 카메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내 분신이 찰칵~ 소리를 낸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 짓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다. 물론 동물들 중에는 자신이 머물렀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동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애써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려고 한다. 밤이 되면 고라니도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면서 자신의 채취를 여기저기 묻혀놓는다. 개들이 전봇대만 보면 오줌을 찔끔거리는 것도 자신의 영역에 대한 표식을 하는 행위이다. 같이 진화해 온 인간 역시도 그 습관이 유전형질에 잠재되어 있어서 영역표시를 즐긴다. 미륵전 벽면의 낙서들이 그렇고 경치 좋은 산천의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이 그렇다. 사람들이 기를 쓰며 노력하는 이면에는 내 이름을 좀 더 널리 알리겠다는 명예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마음을 닦으러 왔으니 머물렀던 자리를 깨끗이 하고 가야 되리라.


     “군대 갔다 오셨죠? 군대 담요 털듯이 하면 됩니다.”

    당황되는 질문이다. 사실 나는 젊은 시절 몸무게 미달로 군대를 가지 않았다. 50이 된 지금도 집에서는 딸내미들에게 군대도 못 간 아빠라고 주는 설움을 단단히 받고 있는 터라 진행을 맡은 일체향님의 이 한마디에 마치 도피자 같은 기분이 되었다. 사실은 젊은 시절에 서울에 살면서 기숙사 생활을 좀 했는데 사감이 공군 대위 출신으로 군대 이상의 군기 속에 지냈다. 담요 터는 법은 그때 배웠다. 그는 새벽 6시면 노란 세숫대야(양은)를 들고 숙소로 들어와 시멘트 바닥에 엎어놓고 당기면 일어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짝을 지어 기숙사 마당에서 담요를 털고 체조를 하는 일이였다. 우리는 그에게 공돌이+군바리라는 뜻으로 ‘공바리’로 불렀다. 그때는 ‘저 공바리 안보면 사람같이 살겠다.’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때 배운 담요 터는 법을 오늘에야 써먹을 수 있겠다. 퍽-하고 나는 소리는 담요가 제대로 털리지 않는 다는 뜻이다. 뻥-하는 소리가 나야 제대로 털리는 것이다. 담요 터는 작은 일도 제대로 하려면 녹녹하지 않다. 하긴 담요 터는 일쯤 제대로 안하면 또 어때!


      마지막 점심공양을 마치고 기념촬영이 있었다. 2박 3일간의 이곳 생활이 마침내 표본실의 박제가 된 것이다. 추억이란 일종의 박제 같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으면 나프탈린을 듬뿍 넣거나 포르말린에 담궈 두면 자주 회상되는 그런 것이 추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스쳐간 추억들이 어떤 것들은 남아있고 어떤 기억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결국 추억이라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만 추억이 된다는 증거다. 얼마 전에 동창 녀석을 만났는데 세세한 몇 가지 나와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나에게는 완전히 소거(消去)되고 없는 추억을 말이다. 분명 당시에는 둘이서 같이 만들었던 추억이지만 나에게서는 사라지고 친구에게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이나 기념물 같은 흔적이 필요한 것이다. 억겁의 시간과 우주의 끝없이 넓음 속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참 인연일 것이다. 감사할 일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도반으로 있어준 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교유할 이도 있을 것이고 금방 서로 잊을 이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다른 평면적 분신을 컴퓨터 파일로 남긴 채…


      옷을 벗었다. 탈속(脫俗)이 아니라 이제는 그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다. 주머니 속의 차 열쇠 꾸러미가 반갑다고 딸그락 소리를 낸다. 오면 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돌계단을 내려디디는 발걸음도 극락교를 건너는 발걸음도 너무 빨라지는 느낌이 되어서 자꾸 더디 걷는다. 사천왕문을 나서는데도 자꾸 고개가 뒤돌아 간다. 와이프도 역시 같은 마음인지 마침내 한 마디 한다.


      “우리 절 앞 찻집에서 대추차나 한잔 하고 가시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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