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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18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여행기 2007. 2. 8. 11:57
보물 제218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곳이 충청도땅 논산(論山)이다. 이곳은
강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기도 하고 전라도 남부의 물산을 바닷길로 운반해와서
다시 내륙을 통해서 전달하는 역활뿐만 아니라 좋은 기후와 물이 풍부한 지형의 덕택에
농사어 더없이 좋은 곳이라 일찍이 백제가 자리를 틀었고 그후에는 후백제가 웅거하는데
큰 기반을 제공해주기도 하였던 곳이다.
백제로 치면 논산은 그야말로 나라의 존망을 가늠할만한 요충지중의 요충지였으며 이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이땅은 또 백제의 마지막 바램이였던 계백의
오첨 결사대가 전멸한 곳이며 후백제의 마지막 왕 신검왕이 패하여 목이 떨어진 곳이기도
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땅 사람들의 자존을 확인해주는 것이 바로 백제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과 이곳이 세상
어느곳보다 뛰어나다는 자랑에 대한 전설이다. 이 부근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죽어
저승에 갔을때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개태사의 무쇠솥', '강경의 미네다리', '은진미륵'의
세가지를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하나라도 보고 오지 못했다면 경을 친다는
전설인데 이 세가지는 모두 이 지역을 호령하던 백제의 멸망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개태사는 후백제의 마지막 왕인 '신검'이 자신의 아버지 '견훤'이 주축이 된 왕건군에게
쫒기다 잡혀 처형된 곳으로 후일 후백제의 완전한 복속을 기념하고 고려황실의 힘을
보여주고자 만든 대규모 사찰이였다. '은진미륵'은 그래도 계속 태동되는 이 지역의 반발에
황실의 거대함을 보여주고 당시 민간의 종교가 된 불교, 그 정수인 부처가 곧 황제와 같음
을 알려주기 위해 왕실이 주체가 되어 건립하였다.
고려의 지배권의 상징이 '개태사'와 '은진미륵'이라고 한다면 그 대척점으로써 이 지역의
사람들이 자존으로 내세운 것이 '강경의 미네다리'일 것이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홍예를
채택한 것도 그러려니와 당시 조선의 물력으로 보아 엄청난 토목공사인 석교를 민간에서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이 지역의 경제력에 대한 표현이며 자랑였던 것이다.
이 세가지를 꼭 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단순이 크고 웅장해서라기 보다 이 지역이
얼마나 강성했으며 언젠가는 다시 그 강성함을 찾으리라는 자존의 표시는 아닐까한다.
그 중의 하나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을 보러 갔다 왔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1963년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으며 한때 국민(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익숙하기도 하다.새로 만든 관촉사 일주문...
일주문 옆에는 제법 넓은 논을 연꽃밭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연꽃이 필때는 제법 구경거리가
될듯 해 보였다. 요즈음 쌀이 남아 도는데다가 일손도 부족한 것이 농촌의 현실임을 볼때에
사찰에서 인수하여 연밭으로 이용하는 것도 윈윈전략인것 같다.
또 나중에 급해지면 다시 벼를 심어면 될터이니~
제법 오래전에 왔었다. 그때는 이 석문이 관촉사의 일주문 역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로 문을 만든데다가 이 석문의 위치가 옆으로 치우쳐 뒷문과 같은 역활로 전락했다.
새로운 것도 좋기는 하지만 옛것을 소중히 하는 것은 더 중요해 보인다.
이 불상은 높이 l8.12m나 되는 대형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몸체는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서 인체의 비례와는 차이가 있고 얼굴모양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 일(一)자로 꼭 다문 큰
입은 엄격한 귀족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이 면류관은 황제의
상징으로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명칭은 미륵보살로 불리우고 있으나 수인을 보면 관세음보살에 가깝다. 역사서에도 잘 나와
있듯 왕건이 몸을 담았던 궁예가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폐하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은 궁예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였을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관세음 신앙을 내세워
민중을 통치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왕실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 지역사람은
이를 미륵이라고 신앙하였을 것이다. 아뭏던 지금의 정식 명칭은 미륵보살입상이다.
968년(광종 19) 충청도 은진(恩津)의 반약산(盤藥山)에 나물을 캐던 아낙 두사람이 갑자기
들려온 아기울음소리를 따라 갔다가 큰바위가 땅에서 솟아나자 관가에 이를 신고했는데
이 소식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이 돌로 불상을 만들고자
조각을 맡을 사람을 응모하였다. 혜명이라는 스님이 이에 응모하여 970년에 100여 명의 석공
(石工)을 거느리고 공사에 착수하여 1006년(목종 9) 37년 만에 불상을 완성하였다.
이 불상은 솟아난 바위로는 하체를 만들었고 주변의 다른 곳에서 옮겨온 돌로 상체를 만들어
합체를 시키기로 했는데 이 합체할 방법을 고민하던중에 주변의 사제촌(沙梯村)에서 한 쌍의
동자가 진흙으로 만든 불상은 흙을 쌓아 올리며 노는 모습을 보고 깨달아 마침내 건립을 했다
고 전해진다.
이 불상이 완공되자 21일 동안 1.8m나 되는 미간의 백호 수정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여 중국의
송나라에 까지 이르러 그곳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그 광명이 촛불 빛과 같다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했다 한다.
이 불상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또 하나의 전설은 완공후 100년이 흘렀을 무렵인 고려 현종때다.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던 거란이 그 배후에 있는 고려를 치고자 대군을 동원하여 침입하였는데
파죽지세로 개경을 함락했고 현종은 나주로 몽진을 했다. 거란군은 왕을 잡아 항복을 받기위해
다시 남으로 진격을 하여 충청도에 이르러 큰 강을 만났다. 일부에서는 압록강이라고 전하나
거란은 여진을 복속하고 있어서 압록강의 물길은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아마 잘못 전해진 것
일것이다.
물에 익숙하지 않은 거란군이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스님이 삿갓을 쓰고 바지를 걷어 올린채
얕은 냇물을 건너듯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거란의 장수는 그곳이 얕은 곳이라고 판단을 하고
군령을 내려 일제히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깊은 강물에 수많은 군졸들이 익사하고 말았다.
부하를 잃은 거란의 장수가 강을 건너온 스님을 찾아 칼로 베었는데 스님은 사라져 버리고
그 스님이 쓰고 있던 삿갓만 한쪽이 칼날에 베인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였다고 한다.
그때 같은 시각에 은진미륵의 몸에서도 땀이 났으며 면류관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스님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현신한 은진미륵이라 하며
지금도 관촉사 은진미륵은 3.94m의 큰 관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꿰맨 자국이 남아 있다.
이 미륵불이 관세음보살이 아니였을까 하는 의구심은 불상조성 당시에 보간에 보관되었다는
불상이 아미타불이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관세음보살의 화불로 아미타불을 봉안
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관세음 보살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수인도 미륵불 보다는 관세음에
가까우며 입술에 연지를 발라 색깔을 낸것도 여성상에 가까운 관세음보살의 특징으로 보인다.
1907년을 전후한 어느날 이 절에 유숙을 청하여 허락을 받은 일본인 세명이 야밤을 틈타서
은진미륵의 보관에 숨겨진 금동불을 훔쳐갔다고 한다.
경내에는 미륵불 외에 보물이 또 한 점 있는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현존하는 8각형의 석등과
달리 4각형의 대형 석등이 있는데 보물 제 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등 앞에는 5층 석탑이 있고 그 앞에는 8엽의 연화 3개가 실물처럼 실감있게 조각된
화강암의 배례석이 있다. 배례석이란 불상이나 탑앞에 제물을 차리는데 쓰이는 용도의 법구로
민간으로 본다면 무덤앞에 제수를 차리는 상석과 같은 역활이다.불교의 삼보중의 하나인 법보(法寶), 즉 경전을 넣어 보관하는 윤장대이다. 법보라면
당연히 보관이 잘되는 건물안에 보관해야 하는데 이 윤장대는 사실 민간신앙과 잇대어
있는 측면이 크다.
삼월삼진날이나 특별한 날에 이 윤장대를 돌리면 자신의 지은 업이나 액운이 물러간다는
것인데 스스로 깨달아 진여를 체득하라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는 십만팔천리나 멀어
지고 말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윤장대는 경북 예천의 용문사에 있는 것인데 이것도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염라대왕 왈(曰) "이것 세가지는 보고 왔느뇨?"
논산의 명물, 강경 미내다리(渼奈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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