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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2. 8. 09:41
2월 8일 오늘의 역사
국내
1329 문익점 출생
1398(조선 태조 7) 서울 숭례문 창건
1452(조선 문종 2) 황희 정승 세상 떠남(1363- )
1572(조선 선조 5) 남명 조식 세상 떠남
1906 런던 트리뷴지 '을사조약의 부당성'에 대한 고종의 밀서 번역게재
1919 동경 유학생, 일본 기독청년회관에서 2.8독립 선언
1944 일제, 전국적으로 강제징용 실시
1946 평양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발족, 위원장에 김일성
1948 북한, 조선인민군 창설 선포
1961 한-미 경제협정 조인
1987 김만철 일가 북한 탈출 귀순
1990 사할린 동포 모국방문 2진 120명 50년만에 방문
1991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
1994 여강출판사, 북한의 <팔만대장경 해제> 수입 계약
해외
1725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 황제 별세
1828 프랑스 소설가 줄 베르느 출생
1834 주기율표 만든 멘델레예프 출생
1883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재학자 슘페터 출생
1904 러일전쟁 발발, 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 기습공격
1924 최초의 독가스 사형 집행이 미국에서 실시
1931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1931-1955) 출생
1955 소련 총리 말렌코프 사임, 후임에 불가닌 취임
1984 제 14회 동계올림픽 유고 사라예보에서 개막
2003 중국, 다탄두 미사일 발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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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던 부족이던 획기적인 문명의 도래를 맞이 할때가 있다. 석기를 사용하던 때에
청동기의 전래가 민족의 운명을 바꾸고 철기의 전래가 또 국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청동기와 석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한시대에 철기문명을 가지고 들어온 기마부족이 신라,
가야의 지배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또한 문자가 없던 (일부 역사학자들은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시기에 전래
해온 한자는 기록문화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신마저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우리민족을 바꾸어온 큰 요소들이 몇가지 있는데 목화의 전래도 그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북방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겨울은 춥다. 이 추위를 견디는 방한의
문제는 자연히 구들을 만들어냈고 겨울이면 따스한 구들에 몸을 의지하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고려때까지만 해도 옷감이라고는 누에고치를 통한 비단의 생산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었으며 잠업은 국가적인 시책사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단을 만드는 공정은 많은 인원의 투입과 생산량의 절대부족으로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반인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는 목화의 재배로 인한 값싸고 대중적인 무명이 있었지만 목화재배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외부로의 유출을 봉쇄하고 있었다. 목화씨를 외국으로 유출시키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국가에서 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1363년 문익점이 원나라로 사신의 일행으로 가게되었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붓뚜껑속에
몇알의 목화씨를 숨겨서 돌와왔다. 돌아온 그는 기후가 다소 따스한 곳을 찾아 처가가 있는
경남 산청의 단성으로 가서 재배를 시도했고 마침내 싹을 틔우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대량재배를 위한 씨앗을 위해 몇년간 재배를 거친후 전국에 보급을 했다.
마침내 단군이래 가장 큰 의복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손으로 만든 무명과 솜이
민간에 퍼졌기 때문이다. 솜을 넣은 두툼한 겨울용 무명옷은 겨울활동을 몇배로 늘릴 수
있었고 솜을 넣은 이불은 난방의 효과를 극대화 시켰다.
그 혁명의 주인공 문익점이 1329년 출생했다. 경남 산청의 단성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목화를 재배하였던 곳에 목화시배지 기념관이 있어서 고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최초의 목화 시배지..산청 포스트읽기
http://blog.daum.net/roadtour/1715572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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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과 조선초를 풍미했던 황희 정승이 1452년(조선 문종 2) 세상을 떠났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고관이나 귀족의 자녀에게는 시험을 치지 않고도 벼슬길을 열어주는
음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1363년(공민왕 12)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약관 13세의 나이로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383년 진사시(進
士試),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이성계의 간곡한 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시작으로 직예문춘추관(直藝
文春秋館) ·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그후에도 형조와 예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南原)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143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가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때 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신하로 유명하였다. 여진족의 발호와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비에도 힘을 쏟았으며 예법에 있어서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다.★
1987년 가족을 모두 이끌고 북한을 탈출했던 김만철 일가의 귀순이 어느듯 20년의 세월이
되었다. 한때 그는 반공 강연장에 어김없이 모습을 보였고 그의 이름을 딴 외식업체도 번성
하여 여기저기 많이 보이기도 했지만 며칠전 그의 남한생활 20년을 맞은 신문기사는 삶이
녹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군대나 공무원, 대기업등의 대조직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사회에 나오면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직금을 다 까먹고 만다고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
은 사기를 당한다거나 친지의 부탁을 박절히 거절할 수 없어서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것이라고 한다.
신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가족11명 이끌고 脫北한지 20년을 맞이한 김만철씨는 지금
천막으로 지붕을 덮은 가건물에서 닭 100여마리를 키워 내다팔고, 일당 1만원 밭농사로
끼니를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한때 강연료등으로 10억원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돈을 모아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사기와 몇차례의 사업실패의 결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같이 온 아이들이 모두 자라 사회의 동량이 되었고 과학자를 꿈꿨던 막내가 서울大
에서 천문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니 자식의 성공이 전부인 세대인 그로써는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신문이 전하는 그의 인터뷰는 지금 현실이 北에서의 생활만큼 어렵기는 하지만 남한 온 것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착잡하다.'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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