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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2. 6. 08:30
2월 6일 오늘의 역사
국내
1019(고려 현종 10)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에서 개선
1707(조선 숙종 33) 이순신 장군 사우(祠宇)에 현충(顯忠) 사호(賜號)
1922 김익상 의사, 상해서 일본군 대장 다나까 저격 미수
1946 덕수궁 이왕직 박물관 최초 일반공개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 논의할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1950 내각책임제 개헌안 공고
1953 성균관대와 동국대, 종합대학으로 승격
1958 뉴욕에서 대한민국 국보 전시회
1971 주한미군 감축과 국군현대화 골자로 한 한-미 안보공동성명 발표
1973 파월 백마부대 돌아옴
1974 권력형 부정대출사건 관련 박영복 구속
1978 서울 시립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으로 개칭
1994 경부-호남 고속도로 연결하는 대전남부 순환 고속도로 착공
1995 한-미 외무장관, 워싱턴에서 회담,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관련 합의
1996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당명 개정
내무부, 재난 신고를 119로 일원화
2003 체세포 복제 법안,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 확정
해외
1611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출생
1840 영국, 뉴질랜드를 식민지화
1904 러-일, 국교 단절
1922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조인
1952 영국, 조지6세 사망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1964 키프로스, 그리스와 터키계 주민 충돌
1967 미군, 베트남에 고엽제 대량 살포 개시
1974 그레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6 미국 록히드사 부회장, 일본에 대한 정치헌금 발언 파문
1976 미국 국립가속장치실험연구소, 새 소립자인 엡실론 발견 발표
1981 소련, 킬러위성 발사 성공
2001 중국 여객선, 사상 첫 대만 직항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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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장군들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큰키에 우락부락한 무골의 체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 기록으로 보아 적은 키였다는 기록은 진주대첩의 김시민장군,
그리고 귀주대첩의 강감찬 장군이 그 주인공일 것이다.
게다가 강감찬 장군은 마마탓으로 얼굴까지 심하게 얽어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죽했으면 원래는 잘 생긴 얼굴이였는데 너무 잘 생기면 큰일을 못한다고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곰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이다.
그 강감찬 장군이 1019년(고려 현종 10)에 거란의 장군 배압이 이끄는 10만명의 거란군을
단 몇천명만 살아가게 만든 귀주대첩을 이루고 이날 개선했다.
거란은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꿈을 가지고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는데 배후세력인 고려를
제압하여야 하는 필요가 있어 이미 2번에 걸쳐 고려를 침범했었다. 특히 2번째 침입에서는
고려의 외교술에 말려 육진을 내주었던터라 그것을 핑계삼아 세번째로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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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고 10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후에야 민족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사우에
현충이라는 사호(賜號)가 내려졌다.
임진왜란이 한창일때 참전한 명나라 관원들의 보고 들은 조선왕실은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를 달렸으며 전쟁으로 온 국토가 피폐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당파싸움은 그칠줄을
몰랐다. 마침내 명나라에서는 나라를 몇개로 쪼개어 유능한 인물을 뽑아 다스리게 할
복안을 가지게 되는데 간접적으로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그 유능한 인물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음인지 사사건건 통제하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를 배알한 명나라의 장수들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순신을
칭찬하는데 그때마다 용렬한 장수라거나 운이 좋았다거나 상국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는 등의 폄하의견을 내어 놓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을 견제할 선조의 카드가 원균이였으나 칠천량해전이라는 유래없는 졸전을
펼쳐 조선수군을 거의 전멸로 이끌어 선조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선조만의 생각이였다기 보다 윤두수등의 정파들이 움직인 결과였을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이순신장군의 전공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이순신 장군의 성장지인 아산에 세워져 있던 장군을 기리는 사우(祠宇)에 현충
(顯忠)이라는 사호(賜號)가 내려져 현충사(顯忠詞)라 불리게 되었다.
110년만에 장군을 기리는 사우(祠宇)의 관리 책임이 나라로 귀속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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