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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1. 10. 09:38
1월 10일 오늘의 역사
국내
1067(고려 문종 21) 흥왕사 낙성 연등회
1135(고려 인종 13) 김부식, 묘청의 난을 핑계로 라이벌 정지상 제거
1400(조선 정종 2) 집현전을 보문각으로 개칭
1894 동학농민군, 고부관아 점령
1950 애치슨 라인 발표
1951 국군, 37도선 이남으로 후퇴
1959 충북선 철도 개통
1962 문화재위원회 설치, 문화재보호법을 공포
1977 서울의 한 박물관에서 고려초조대장경인본을 발견
1980 충주 다목적댐 기공
1989 재불화가 고암 이응로 별세
1991 한일 2차 정상회담, 한일협력 3원칙에 합의
1994 한국남극점탐험대(대장:허영호) 남극점 정복(1,400km를 도보로 성공)
해외
BC49 시이저, 루비콘 강을 건너다
1234 중국 금나라 멸망
1668 터키 이즈미르에 지진 발생 2만여명 사망
1837 러시아 시인 푸쉬킨 세상 떠남
1863 영국 런던에 세계 첫 지하철도 개통
1946 제1회 유엔총회 런던에서 열림
1951 미국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싱클레어 루이스 별세
1962 페루 눈사태 사망 3,000여명
1967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 미국의 월맹 폭격 중지 촉구
1971 세계적 명품 디자이너 '샤넬' 별세
2000 타임워너-AOL 합병, 세계최대 미디어 업체 `AOL 타임워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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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일을 가끔씩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고 한다. 이 말은 로마의 케사르,
우리에게는 시이저로 알려진 그의 정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많은 정치적 성공과 뛰어난 웅변술, 전장에서의 용맹성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로마최고 지위의 집정관에 올랐다. 그는 꾸준이 원로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려
노력하는 바람에 원로원은 그의 정적으로 돌아섰다.
안으로는 내분을 3두체제라는 정치적 협상을 통해 잠재우고 오랜 동안의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평화를 찾는 듯 했으나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죽자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폼페이우스와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영향력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했다.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에서 승리를 거두고 퇴각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를 완전히 격파하였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존신 독재관으로 임면되는등 최고 권력을 향유하다가 BC 44년 3월
원로원 회의장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원로원은 BC 42년 케사르의
신격화를 결의하였으며 BC 29년에는 당시 로마의 통치자 옥타비아누스는 케사르를 위한
신전을 짓겠다고 공포하였다.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이름없는 지방관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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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부관아 점령이 1894년 오늘에 있었다.
1876년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개항이후 특히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여
조선의 일본 시장화및 쌀의 대대적 반출로 인하여 물가의 앙등등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게다가 일본어민의 우리해역에서의 조업과 일본 기선업체들의 세곡운반 독점에
따라 어민들의 생활 또한 피폐해지는 등 절박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부의 매관매직 풍토로 탐관오리들이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전라도의 곡창인
고부도 이런 상황은 예외가 아니였는데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조병갑은
민씨정권에 수만금을 바치고 벼슬을 사왔으므로 자연히 탐학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과중한 세미를 거두어 들여 일부를 착복하는가 하면,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석방이나 면책을 조건으로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기도 했다. 또 부친의 송덕비각(頌德
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강제로 징수하기도 했다. 게다가 고부농민의 젖줄
만경강에 기존의 농사용보가 있는데도 세금을 징수할 목적으로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
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면서 인근 산림을 마음대로 훼손하기도 했다.
그해 가을에 만석보의 수세(水稅)로 700여 섬을 받았는데 정부의 공식보가 아니였으므로
고스란히 조병갑이 착복하였다.
이런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시 훈장으로써 지역의
지식인 역활을 하면서 동학의 고부접주였던 전봉준을 선두로 삼아 봉기를 일으켰다.
이날 새벽 말복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은 머리에 흰수건을 동여매고
죽창을 들고 고부관아를 일거에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한 다음 창고의 세곡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내걸었던 폐정조목은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등이였다.
이날의 의거는 훗날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군대의 편제를 갖추는
등으로 발전하지만 열락한 무기와 전략의 부재등으로 실패를 하게 되지만 가장 하부계급이라
할 수 있는 농민들이 스스로 일어나 부정과 외세에 항거했다는데에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참고글 보기***
동학농민전쟁의 시발점, 만석보의 현장
http://blog.daum.net/roadtour/3593605 <--- 클릭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를 찾다.
http://blog.daum.net/roadtour/2182537 <--- 클릭
동학농민전쟁의 발상지 - 무장기포지
http://blog.daum.net/roadtour/55863 <--- 클릭'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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