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오늘의 역사
국내
647 신라 선덕여왕 별세
1932 이봉창 의사 일본 동경에서 일본 왕에게 수류탄 저격 의거
1936 연희전문 농구단, 전일본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1948 유엔한국임시위원회 회원단 내한
1949 반민특위 발족
1963 한-미 군사협정 체결
1965 국무회의, 월남에 국군 2천명 파병 결정(1월 26일 국회 동의)
1974 긴급조치 1호(헌법논의 금지), 2호(비상군법회의 설치) 선포
1975 남북조절위 제9차 부위원장 회의, 서울측 북한에 우편물교환 제의
1981 한국미술 5천년전 미국 뉴욕에서 개막
1985 이라크 공군, 이란 영해서 한림해운 소속 마리너호에 미사일 공격
1993 국립교육평가원, 독학사 147명 첫 배출
1994 서울 제2기 지하철(6,7,8호) 공사 착공
1997 KEDO(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북한, 경수로 건설부지 의정서 서명
해외
881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황소에게 점령 당함
1324 모험가 마르코 폴로 사망(동방견문록)
1642 지동설 주장한 갈릴레이(이탈리아, 1564-1642) 별세
1918 미국 윌슨 대통령, 민족자결원칙 주장
1935 미국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출생
1942 영국 이론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출생
1959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964 파나마 운하지대에서 파나마 학생과 미국군 유혈충돌 반미폭동 유발
1976 주은래(중국 수상) 별세
1996 프랑스 미테랑 전대통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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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 선덕여왕이 647년 별세했다. 선덕여왕은 재위하는 동안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김유신과 김춘추를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기도 했고 비담과 염종의 모반을 진압하는 등 국내 정치를 안정시켜 신라의 부국강병을
주도 했다.
선덕여왕은 부왕인 진평왕(眞平王)의 뒤를 이어 632년 신라의 제27대 왕으로 즉위했었다.
특히 선덕여왕에게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지혜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기록에 남아있는 세가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
三事)〉에 기록되어 있는 문헌설화이다.
첫번째는 당태종이 보낸 모란꽃의 그림과 그 씨앗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연했는데 나중에 그 꽃을 심어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신라의 선덕여왕 때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3~4일 동안
울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신하에게 지시 하되 급히 군사를 여근곡(女根谷)에 보내어
잠복하고 있던 백제 군사를 토멸하라 지시 한바 왕이 지시한데로 군사를 파견한즉 과연
백제군사가 여근곡에 매복 하여 있어 이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도 모조리 무찔렀다.
이 일을 신하들이 궁금히 여기자, 여왕은 "개구리는 눈이 불거진 모양이 성난 형상이니
군사의 상징이고, 옥문이란 여근(女根)이며, 여자는 음(陰)인데 그 색은 희고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은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근곡은 경주시(慶州市)에서 대구(大邱)방면(方面) 약16km 건천읍과 산내면 사이에 있다.
높이 640m의 높지 않은 산으로 전설(傳說)과 사적(史蹟)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맞은 편은
단석산이 있으며 단석산과 여근곡이 있는 부산(富山)의 사이를 청도로 가는 국도가 지난다.
부산(富山)에서 가장 유명(有名)한 곳이 여근곡(女根谷)이다.
산 지형이 영락없이 여자의 국부를 닮았다고 하여 여근곡이라 하며 아래의 마을 이름은
샙골 또는 섭들 마을 이라고 한다. 현재 여근곡에는 유학사라는 조그만한 사찰이 있고,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우물이 있다.
세번째는 자신이 죽는날을 예언하면서 도리천안에 장사지내라고 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 물으니 낭산의 남쪽비탈이라고 해서 나중에 그곳에 왕릉을 만들었다. 그후 10년뒤
문무대왕이 능 아래 사천왕사를 창건하니 불경에 따라 자연히 선덕여왕의 왕릉이 있는
곳은 자연히 도리천의 위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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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하에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우국지사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어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일본군에게 타격을 준 것은 청산리 전투등의
정규전과 더불어 주요건물에 대한 테러와 요인암살을 단행한 의열단의 투쟁이였다.
특히 의열단의 투쟁은 1천명의 일본군이 1인의 독립투사를 상대로 해야 하므로 효과적인
타격을 주었고 심리전의 양상도 있었다. 임시정부도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의열단 투쟁과
같은 방식의 투쟁을 도입했는데 윤봉길, 이봉창 열사의 투쟁이 대표적이다.
1932년 1월 8일에는 이봉창 열사가 일본의 중심인 동경에서 일본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1924년 그는 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에 다니다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의 애국단에 가입했다. 1931년 12월 2일
일본 왕을 암살할 것을 지령받고 수류탄 2개를 가지고 일본으로 잠입하여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왕 부의(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와 함께 일본군의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본 왕
'히로히또'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아깝게 실패했다.
33세의 나이로 1932년 10월 10일 이찌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