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오늘의 역사
국내
1438(조선 세종 20) 장영실, 자동 물시계인 옥루 만들어 흠경각에 설치
1903(조선 고종 32) 김홍집 내각, 개혁안 홍범14조 제정 선포
1947 한국문제(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실시) 유엔에 상정
1948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 실시
1949 이승만 대통령,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
1950 일본, 재일동포 62만명에 강제 등록령 포고
1955 국무회의, 중고등학교를 분리하기로 의결
1995 김수환 추기경, 방북용의가 있음을 발표
해외
BC49 로마 원로원에서 시이저 파 추방
1610 갈릴레오, 목성의 4대 위성 첫 발견
1762 모짜르트의 대중 앞 첫 연주(6세)
1839 이탈리아 소설가 비다 출생<플란다스의 개>
1927 대서양 횡단 전화 서비스 실현
1959 미국,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 승인
1961 카사블랑카 선언
1968 미국 서베이어 7호 발사(1968.1.9에 달 착륙)
1989 히로히또 일본왕 세상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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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우리나라 땅이였다는 기록은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기록보다 훨씬 명확하고 많다.
신라때부터 일본으로 사신이 오갈때는 늘 이 대마도를 경유했으며 그 기록은 세종실록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인
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고려때에 이르면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리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속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세종조, 북쪽영토의 경계확정과 남쪽의 경계확정 작업에 따라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하고 주둔하며 속주로 삼았다.
1436년에는 흉년이 들어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대마도주는 상소를 올려 대마도를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고 한다. 조선조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하기도 한다.
16세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
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볼때 우리나라의 영토라고 조선의 조정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때 전쟁을 위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하를 시켜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대거 일본인들이
유입되어 인구의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바뀌어진듯 하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되어 있어서 근대까지
대마도가 우리영토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8세기에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했던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에는 대마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인 메이지 정부에 와서야 비로소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도에서 일본정부에 올린 문서에 보면 오래전부터 조선에 복속되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기자 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다.
이 요구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의 요구를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맥아더는 친일본 경향이 워낙 강해서 이승만은
공식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한 공식적인 요구를 하지 않고 대부분 각국의 외교사절들에게
주장하는 선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