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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모와 같이 한 성묘길
    로모가 만든 풍경 2006. 11. 13. 16:18

     

    로모와 같이 한 성묘길

     

     

    필름 카메라는 그야말로 아날로그다. 100% 아날로그라고 할 수는 없다.

    디지탈 카메라가 나오기 전에는 필름카메라도 감기부터 찍는 것까지 자동으로 작동하는

    자동카메라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일단 필름을 모아서 인화를 한다는 것에서는 아날로그

    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디지탈 카메라는 한컷만 찍었어도 메모리 쏙~빼서 USB에 연결만하면 LCD 화면에 뜨니

    그 시간적 공간의 폭이 좁지만 필름 카메라는 필름 한통을 소모하는 동안을 기다려야 하고

    (뭐..24장짜리 필름을 넣고 두어컷 찍을 수도 없고...) 현상해서 인화해야 하고 그것을 다시

    스캐너로 한참의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 필름카메라를 즐기는 것은 아하! 그대 그랬지..맞어, 여기는 그기야..등으로

    오래지는 않지만 다소 날짜가 지난 추억을 반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추석부터 찍기 시작한 필름 한통을 로모(LOMO)가 뱉어 냈다. 일련의 아날로그적인 과정

    가운데서 인화부분을 생략했다. 그냥 CD에 담아 달라고 하면 인화와 스캔의 과정을 줄여

    제법 번잡함을 들수 있다.

     

    아하!

    추석 연휴에 집에서 고향으로 가는 도중과 성묘가는 길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아닐로그는 이래서 좋다. 찍었어도 잘찍었는지 핀트는 맞았는지 알수없는 것도 매력이다.

     

     

     

    추석 쐬러 가는 길에 처음 쉬었던 휴게소에서 새로운 필름으로 장전을 했다.

    첫장이라고 해야만 할까? 엄격하게 따지면 첫장은 아니다. "1"이라는 시작점에 서기 위한

    연습판이라고나 할까......

     

    사진관에서 인화를 하면 늘 잘나온 것만으로 뽑아준다. CD에 담아진 것들 속에는 이렇게

    버려졌을지 모르는 아쉬움들도 있게 마련이다.

     

    마치 잃어 버린 기억들 같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걸음 이전의 기억들 처럼...

     

     

     

    빙 돌아 다녔다. 충청도에서 고향인 부산으로 가는 길은 늘 대전-진주-김해를 거쳐서

    돌아서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동대구-대저간 고속도로가 새로 뚫렸다.

     

    새벽 2시의 청도 휴게소...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게한 원동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청도는 토박이들의 텃세가 심하기로 유명했었다.

    고등학교때 였던가 싶다. 몇이 얼려 기차를 타고 텐트를 들고 청도로 하룻밤 야영을 갔다.

    그 동네 또래들의 텃세로 아주 고생을 했다. 나중에 돌아와서야 청도텃세의 유명함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청도는 감이 유명하다. 요즈음은 소싸움으로 전국에 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운문사라는

    유서깊은 절도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 저곳의 휴게를 참 많이도 다녔지만 이곳의 유일한 특징을 발견했다. 여기는 화물차가

    많이 와서 쉬는 곳이다. 오랜 운전을 해야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발을 씻고 쉴수 있는 쉼터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들에게 쉼터란 당연히 트럭 운전석의 뒷자리 좁은 공간이다. 발을 씻고 차로 돌아가 내일의

    꿈을 꾸는 그들은 대한민국 산업의 동맥이다. 그들이 있어서 오늘도 우리의 산업은 쉬지않고

    심장을 펄떡거린다.

     

     

     

    그럭 저럭 한시간이나 쉬었다. 새벽 3시에는 가로등도 졸리운 모양이다.

    이제 한시간이면 절간의 도량석처럼 고향집 대문을 두드릴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삶도 두개의 가로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빤히 바라다 보이면서도 쉽게 오고 가지 못하는 그런......

     

     

     

    고향집은 시골이 아니라 번화한 도시의 주택가에 있다. 윗채와 세를 주는 아랫채가

    마주보고 있는데 주로 월세를 놓아 한때는 8가구가 살았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아랫채에 8가구, 윗채의 2층에 2가구, 그리고 주인집인 우리까지 셈해서

    11가구가 모여 살았다.

     

    아침시간이면 4칸짜리 공동화장실이 번잡했다. 이제는 월세를 전세로 돌려도 셋방을

    찾는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 놀린다. 이제는 철거 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건물이다.

     

    아침 출근시간에 잠깐씩 듣는 시사프로그램이나 대담프로그램이나 조간신문에서나

    어디서나 부동산이 가장 큰 화두다. 따지면 부동산의 문제는 정책의 문제보다는

    국민들의 의식의 문제가 더 크다. 너도 나도 부동산을 통해서 일확천금을 꿈꾸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사회 형상이다.

     

    누구나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도면 족함을 느껴야 하는데도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포인트를 맞추다 보니 달랑 3식구 사는데도 마흔평이 넘는 아파트를 사려한다.

    평수가 적은 아파트는 팔때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보급율 100%를

    넘겨버린 주택수요임에도 서울과 경기도 일부에서는 아파트값이 폭등하는 것이다.

     

    내가 보는 아파트 폭등의 문제는

    첫째) 전국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 일부에 국한되고 있다.

    둘째) 아파트로 한몫 잡으려는 투기심리(서민이라면 강남은 꿈도 못꾼다)

    셋째) 잘못된 투기심리의 뒷꿈치를 쫓는 정책의 혼선

    넷째) 그 혼선을 부풀려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야당 정치인

    다섯째)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언론매체

    여섯째) 일부 지방에 한꺼번에 풀린 개발자금(몇억씩 보상금 받은 사람들 강남으로~)

    일곱째) 잘 하면 몇억 버는데... 아줌마들의 담합

    여덟째) 올라야 구전도 크지! 부동산 매매업자들의 농간등이다.

     

    내가 생각해도 대책이 서지 않는다.

    100년전의 동학혁명처럼 서민혁명이라도 나야 하는지......

     

     

     

    요즈음은 추석 하루전날 성묘를 간다. 그도 사실은 정석은 아니지만 당일은 워낙이

    길이 막혀서 몇년 전부터 집안끼리의 상의에 의해 전날 가는 것으로 했다.

    조상을 모시는 일은 정성이 半인데 싶기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풍습도 변하게 마련이다.

     

    필름카메라중에서도 로모는 핀트 맞추기가 까다롭다. 무한대에 맞추고 찍으면 대충

    두리뭉실하게 잘 나오는데 꽃이라 0.8로 맞추고 찍었는데 원하던 부위보다 뒤쪽으로

    핀트가 맞았다. 할아버지 산소로 가는 길에 만난 진달래 한그루, 꽃 두송이...

     

    추석에 진달래를 본다는 것이 즐겁기는 했지만 시절을 잘못알고 피어난 진달래 꽃은

    오히려 애처로워 보이기만 하다.

     

    험! 이 참에 내 마음속의 시계도 태엽을 미리 좀 감아두어야 겠다. 애처로워 보이지 않도록...

     

     

     

    "행님! 어데 가십니꺼?"

    샛길로 냉큼 접어들자 이내 아우의 물음이 뒷통수를 스치는 바람에 실려온다.

     

    "여기가 경치가 좋은 곳이다."

     

     

     

    거의 해마다 한번은 서는 곳이다. 구포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여기 서면 오래된 추억의 보물지도가 사라락 거리며 공단치마가 펼쳐지는 소리를 낸다.

     

    가운데 두개로 보이는 다리중에서 낮은 쪽이 오래된 구포다리다. 지금은 세월을 못견뎌

    가운데가 물에 떠내려 가버린 저 구포다리는 내 유년의 기억의 끈이다.

     

    그 옆으로 도시와 강의 경계에 있는 구포둑... 바로 앞 억새너머 보이는 낮은 산이

    구포왜성이고 그 앞에 제법 큰 건물이 부산에서는 보기 드문 아이스링크장이다.

    아이스링크장이 들어선 그 산은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봄이면 삐리를 뽑고

    바위에 누워 봄볕을 쪼이고, 봄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아베크족들로 부터 자리를

    비켜달라는 조건으로 20~30원( 구포극장 입장료가 5원하던 시절...)씩 받기도 했다.

     

    사고가 자주 나서 주검들을 자주 보게 해 주었던 철로도 저기 보인다. 아버지가 열심히

    다니셔서 5남매를 키운 밀가루 공장의 자리엔 이제는 몇개의 모텔들이 들어섰다.

     

    길쭉하게 자리잡은 갈대밭도 보인다. 중학교때 여름방학 숙제로 개구리를 잡으러 왔던

    다리를 조금 절던 친구가 죽었던 곳도 저곳이다. 나는 방학이면 항상 밀양의 외가로

    갔고 친구는 내가 구포에 있다는 것만으로 버스를 타고 왔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어서

    서로 연락이 되었더라면 개구리는 논에서 잡아야 한다고 가르쳐 줄 수 있었더라면 지금

    그 친구와 옛이야기들을 주고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인생은 늘 불규칙적인 도형과 같다.

    졸업앨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친구 생각이 유난스레 마음을 후볐다.

     

     

     

    아버지의 유년은 불행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돈 벌겠다고 가셨다가

    조그만 상자 하나에 담겨져 돌아왔고 아버지의 어머니는 새 삶을 꾸리러 떠나셨다.

    아버지는 사촌형집에 얹혀서 머슴처럼 삶을 살았다. 늘 배가 고팠고 배앓이도 자주 했다.

     

    30리 산길을 걸어서 나무를 해오는 일은 매일 거듭되는 일상이였고 지금은 탑이 쌓인

    이 고개오기전 약수터에서 맹물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두개의 고개를 더 넘어 이곳에

    오면 항상 배가 아팠다. 나뭇짐을 바쳐두고 아픈 배를 움켜잡고 눈물을 삼켰던 곳이다.

     

    이 고개는... 그런 곳이다.

    좁아진 아버지의 늙은 어깨를 보면 코끝에 작은 전류가 흐른다.

     

    5남매가 태어날 무렵엔 아버지는 밀가루 공장에 다녔다. 야근을 한 후에는 집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는 논으로 나가서 논일을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농번기에는 남의 야근을

    대신 해 주기도 했다.

     

    30리 나뭇길은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젖도 떼지 않은 막내를 우리들에게 맡기고 나뭇짐

    머리에 이고 오다가 젖이 아파서 쉬던 곳이기도 했다.

     

    이 고개는... 그런 곳이다.

    부모는 늘 주기만 하고 자식은 늘 잊어버리기만 한다.

     

     

     

    큰 할배... 우리는 늘 그를 이렇게 부른다. 그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였다.

    할아버지 삼형제중의 맞이였다. 경주부근의 인보가 고향인데 선산과 고향을 뒤로하고

    삼형제를 이끌고 밀양을 거쳐 마침내 구포에 정착을 했다.

     

    지금은 직계자손이 모두 동두천으로 미국으로 흩어져 오지 않는다.

    둘째 할아버지의 직계 손자들은 모두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소원해졌다.

    막내 할아버지의 자손인 우리 가족들만 이제 산소를 찾는 흑백사진으로 남겨졌다.

     

     

     

    바로 아래에 지금은 평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할배..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얘길르 듣고 일본으로 갔다가 탄광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자그마한 상자 하나에 담겨져 돌아오셨다.

     

    늘 이장을 했으면 하지만 바로 위에 계시는 큰 할배 산소가 걸려서 주저 앉곤 한다.

    무덤은 함부로 손대면 안된다는 속설때문에 크게 보수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산으로 터널이 뚫린다고 한다. 언젠지는 모르지만 예산만 확보되면 한단다.

    그리되면 두분의 할배도 자리를 옮겨 드려야 한다.

     

     

     

    이 산꼭대기에도 자리공이 올라왔다. 저놈이 있는 곳은 토양이 산성화 한다고 한다.

    귀화식물 중에서도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드물게 독한 녀석이다. 로모의 핀트가 또

    안 맞았다. 디카에 습이 든 탓인지... 건망증의 초기증세인지 거리 레바를 자꾸 잊는다.

     

    그래도 이 녀석보다 더 강한건 우리 민족이다. 이 독한 식물도 우리는 한약재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둘째 할아버지의 할머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다. 나에게는 삼촌이 되는 분이다.

    삼촌은 해방직전 우리 집안의 기대주 였다. 드물게 법학을 전공했는데 학창시절에

    접한 공산서적때문에 결국 군대를 자원하게 되었다.

     

    한국전쟁때 몇몇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탓에 전쟁이 끝나고 헌병이 되었다.

    결혼식을 하는 날 오토바이가 전복되어 헌병 상사로써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해진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다. 숙모는 뱃속에 아이를 가진채......

     

    결혼식이 진행되는 한쪽에선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다.

     

    그후에 유복녀가 태어났다. 나보다 서너살 어린 이 여동생은 지금은 미국에 있다.

    몇년전에 아버지 산소를 찾아 와서 얼마나 섦게 울던지....

     

     

     

    사람이 산다는 게 마치 깨진 거울 같을때가 많다.

    일부는 남아서 그 자리를 떠나면 안될것 같아 남아있고 일부는 남아 있으면 안될것 같은...

     

     

     

    태극기가 걸린 추석...

    연휴들의 사이에 끼인 추석이 드물게 태극기가 펄럭이는 추석으로 호사를 했다.

    디지탈 시대에 몇 남지않은 아날로그 같은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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