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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옥수수밭... 2003-08-06 오전 9:30:42
출근하면서 퇴근하면서 매일 마주치는 옥수수밭..
그냥 작은 밭뙈기가 아니라 제법 큰 옥수수밭이다. 그 옆에는 사과밭
건너편에는 배밭이 있다.
어릴적..우리집은 그야말로 똥고가 찢어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공납금이 있던 그시절에 6년을 면제받고 다녔으니
가난은 늘상 붙어다녔다.다행으로 가친이 노름이나 술로 재산을 탕진하지 않으시고 모친도 무척
부지런하셔서 밥은 굶지 않는 정도였다.
그러나 늘쌍 쌀밥이 그리운 적당한 가난이 어쩌면 지금 내 윤택한 정신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할때도 있다.
태어나고 자란곳이 구포였는데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한곳이라서인지
학교에서 급식이 나왔었다.
처음에는 옥수수죽이 나왔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주번이 바께스를 들고
소사아저씨(학교에서 잡일하는 분을 이렇게 불렀다)가 살고있는 학교사택앞에
가면 큰솥에서 끓인 옥수수죽을 퍼준다.
또 다른 친구는 주전자를 두개를 양손에 들고가서 물에다 양유가루를 풀어서
끓인 양유를 받아와서 급식이 이루어 진다.
간식거리가 거의없던 그시절에 학교에서 받아먹는 옥수수죽과 양유는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하얀쌀밥에 오뎅(우리에겐 정말 귀한거였다)반찬으로 도시락을 싸다니던
시장통아이들이 돼지죽이라고 놀리던 말던 설겆이가 필요없을 정도로 비웠다.
얼마후에는 죽에서 빵으로 바뀌었는데 재료는 여전히 옥수수였다.
대개는 전날 차로 배달이 되는데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사각통에 가득 담겨있는
그 빵은 선생님의 사택과 가까운 양호실 복도에 보관을 했다.
다음날 점심때에는 이제는 양유가루가 아닌 우유가루로 물과 섞어서 우유만 만들면
되었으니 소사아저씨의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때는 우리에게 소사아저씨의 권력은 대단했다. 마음에 들거나 기분이 좋으면
주전자에 넘치게 주므로 그런날은 한컵을 더 얻어걸릴수도 있었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난로에 갈탄을 배급했으므로 그 권력이야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때는 옥수수라고 하지는 않았고 강냉이라고 했다. 이때쯤이면 방과후 우리는
온 동네의 강냉이밭을 헤매고 다닌다. 옥수수 수염을 따러 다니는 것이다.
짧거나 허여멀건놈은 빼고 빨갛고 긴놈으로 골라서 채취하는데 보관도 아주
가지런해야 한다.
그런 놈을 한소쿠리 모아서 가져가면 약재상의 아저씨가 심사를 해서 1원에서
3원까지 돈을 준다.
그때 구포에 있던 극장구경이 5원하던 시절이라서 꽤 큰돈이 되었는데 10번정도
가져가면 절반정도는 반려된다. 그래서 강냉이수염은 하루종일 다녀도 빨갛고
긴놈을 찻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밭주인이라도 있으면 얼씬도 못하니....
방학때는 항상 밀양에 있는 외가에 가서 한달씩 지내다가 오곤 했는데 외가에는
씨앗옥수수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옥수수 수확후에 실한놈들로 골라서 오줌통(그때는 오줌만 모으는 단지가 있었다)에
며칠 담갔다가 처마끝에다 매달아 놓았다가 봄되면 파종을 하는데 몇개 남은 놈은
흉년을 대비해서 버리지 않고 다음 수확때까지 그냥둔다.
강원도나 다른 지역보다 밭작물의 수확시기가 늦은 경남에는 여름방학때가면 옥수수의
수확이 아직 이른때다. 옥수수는 먹고싶고 .....
외가에 가면 항상 외할아버지와 한방을 쓰는데 운동도 시킬겸(나는 몸이 약했다) 소죽을
끓일때 깨워서 아궁이 앞에 앉혀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신다.
연료가 주로 왕겨를 쓰는데 손으로 돌리는 풍구를 이용했는데 가끔 나에게 미루어 놓고
딴 볼일을 보시기도 한다.
그 날도 나는 혼자서 풍구를 돌리다가 사랑채처마끝에 매달린 강냉이(나는 씨앗인줄
몰랐다)를 걷어와서 나무바가지에 넣고 소죽안에 띄어서 놓았다. 소죽이 끓어서 늘
하던대로 풍구를 빼서 한곁으로 밀어놓고 솥두껑을 여니 너무 맛있게 익었다.
새벽바람이 찹다고 해도 여름인데 아궁이 앞에 앉아서 몇개인지 기억나지않지만 암튼
그렇게 맛있는 강냉이가 그후로 없었을 만큼 맛있게 먹어버렸다.
돌아오신 외삼촌은 배꼽이 터져라 웃으면서 이넘아..그거 오줌통에 며칠이나 담궈두었던
거란다..챙피하기도 하고 배속이 걱정도 되고 더러운 오줌에...서러움이 밀려와서 인지
눈물을 글썽이니 약된다..괘안타...하신다. 온 집안에 오랬만에 웃음꽃이 피었지만 나는
하루종일 시무룩하게 지냈다.
그날 저녁에 장에 갔다가 오신 외삼촌의 손에는 갈치몇마리와 파란 줄무늬가 들어있는
반팔티 하나를 사오셨다.
이즈음의 옥수수밭을 지날때마다 옛추억들이 생각난다. 외삼촌은 요즘 어떻게 계시는지
궁금하다..이번 추석에는 무리해서라도 한번 찾아뵈어야지..'이런저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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