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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패의 근거지, 안성 청룡사여행기 2006. 10. 17. 13:31
남사당패의 근거지, 안성 청룡사
경기도의 안성은 충청,경상,전라 3도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점이었던 탓에 예로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안성장은 조선에서 열손가락안에
꼽을 만큼 규모가 크기도 했으려니와 물산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안성유기는 워낙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아주 잘 들어 맞는 것을 '안성맞춤'이라고 하기도 한다.
안성에서는 서운산이 명산으로 꼽히는데 이 서운산의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있고
북쪽 산록에는 '석남사'가 자리 하고 있다.
그 중에서 '청룡사'는 조선말에 등장한 남사당(男寺黨)패들의 근거지 역활을 했던 곳이다.
남사당은 일종의 유랑예인 집단이다. 유럽의 집시들처럼 떠돌아 다니는 유랑예인 집단은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남사당이였다고 전해 진다.
최근에 이 남사당이 알려진 계기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서 인데 그 영화에
출연한 풍물패도 역시 안성을 근거지로 한 풍물패라고 하니 안성과 풍물은 빼놓을 수 없고
그들의 근거지로써의 '청룡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잠깐만 남사당패에 대해 살피고 지나가자.
이들의 조직은 '모갑이' 또는 '꼭두쇠' 라고 부르는 대장 밑에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가
있고,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인 '뜬쇠', 연희를 배우는 단계인 '가열', 초입자인 '삐리', 나이가
많아서 고문역활을 하는 '저승패', 잔심부름을 맡는 '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 진다.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단원들이 모여들거나 흩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기획자격인
'곰뱅이쇠'는 남사당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인데,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얻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뜬쇠'는 주로 연기를 담당하는데 '가열'의 숫자는 '뜬쇠'의 재량에 속했다.
초심자이며 궂은 일을 담당하는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연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열'이 되며, 여장(女裝)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단원들은 주로 가난한 집의 어린이나 가출한 아동을 받아들였으며 때로는 유괴를 하기도 했다.
이 남사당패들은 규율이 아주 엄해서 '꼭두쇠'에게는 생사여탈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꼭두쇠'는 반드시 남자가 맡았다고 하는데 안성 남사당중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였던
'김바우덕이'가 배출되었다.
그녀는 참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가 간 여성이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1847-1870)이며 출생지는 어디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5세에 남사당에 들어가 15세에 '꼭두쇠'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 역시 남사당으로
이모(李某)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바우덕이와는 20년의 나이차가 있었다.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뛰어난 기량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미모 또한 빼어나 많은 사내들의
가슴을 태우고, 보는 사람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그녀의 미색은 현재까지도 안성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당시 양반가의 규중에서도 칭찬했었다고 한다.특히, 바우덕이는 소고에 능했으며 경복궁 중건 때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뽑혀서
소고와 선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원군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고 대원군은
일꾼들을 신명나는 세계로 인도하는 그녀의 예술성을 칭찬하고 옥관자를 하사하였다.
남사당패들은 한 겨울을 안성 서운산 청룡사에서 나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절에서 준 신표
( 아마도 다른 지역을 가게 되었을때 잠자리가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부근의 사찰에서
숙소오 사용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를 가지고 안성장터를 비롯하여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바우덕이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안성지방에 전래되는 속요의 한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安城靑龍 바우덕이 小鼓만 들어도 돈나온다.
安城靑龍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나온다.
安城靑龍 바우덕이 줄위에 오르니 돈쏟아진다.
安城靑龍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미인박명이라고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바우덕이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남편 이모는 당시 나이 마흔 두살이었는데 제 계집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청룡사 개울
숲에서 바우덕이를 화장해 뿌리고는 미친듯이 남사당에만 몰두했었다고 전해진다.
청룡리에는 나팔바위, 또는 울바위, 떵뚱바위라고 불리우는 바위가 있는데 바우덕이의
남편이 매일 같이 그 바위에 올라가서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바우덕이의 남편 이모는 바우덕이를 여위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생시에 자주 가서 놀던
그 바위에 올라가 나팔도 불고, 장고도 치고, 울기도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그렇게
부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1990년 말경까지 그녀의 묘지는 돌보는 이 하나없이 잡초 속에 황량하게
버려져 있었다 한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 `안성남사당`이 1989년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안성 지방의 예능을 주도했던 바우덕이를 기리고자
서운산 밤나무골 양지바른 비탈에 묘를 새롭게 단장했다.청룡사의 입구길이다. 왼쪽으로 서운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흐른다.
이 개울건너편에 남사당 마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청룡사의 일주문을 겸한 작은 건물...
대형사찰급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이나 금강문, 사천왕문 같은 것은 없다.
창건당시에는 제법 사세가 컷고 한때는 조선 왕실 왕자의 원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그마한 사찰로 남았다.
개울옆 바윗돌에 새겨진 맷돌의 흔적... 남사당패들은 머언~ 행로에서 돌아와
이곳에다 녹두를 갈며 다음 원행을 기약하고는 했을지 모르겠다.
'청룡사'가 남사당(男寺黨)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이야기 하고자 하다 보니
사설이 무척 길어지게 되었다. 청룡사는 1265년(고려 원종 6)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에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고려의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에 조성한 청동종이 있는데 이 역시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靑龍寺)는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해서
지금도 청룡사 건너편에는 남사당 마을이 남아 있다.무었보다도 청룡사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절을 지을때 기둥을 다듬지 않은 채로
껍질만 벗기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울퉁불퉁한 그대로 나무가 살아 있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건물로 완성되고 있다.
반듯하게 깍고 다듬어 매끈한 모습으로 만들수도 있었겠지만 청룡사를 지은 이는
자연 그대로 나무를 사용하므로써 우리가 찾아야 할 마음의 원형을 보여준것 아닐까?
천진불(天眞佛)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파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이
곧 불성인것 처럼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아갸 함을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닐까?
청룡사의 대웅전이다. 청룡사 홈페이지에서 이 대웅전의 설명을 인용한다.
청룡사대웅전 (靑龍寺大雄殿)
보물 824호 고려 원종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된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청룡사 홈페이지 내용인용)안성청룡사동종 (安城靑龍寺銅鍾)
보물 11-4호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또한, 검은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서 원래는 1674년에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도
매일 행해지는 예불의식 때마다 종을 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筒)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 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가 있다. 그 아래에 배가 불록한 포탄 모양의 종이 있다.종신의 표면을 보면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
眞言)"을 1줄씩 새기고 그 아래 사다리꼴로된 4개의 유곽(乳廓)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位牌)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이 같은 구성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정통 승장계(僧匠系)장인들이 주로 썼던 방식이다.
이 종은 숙종 대에 활동했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태행(太行)·도겸
(道兼)·담연(淡衍)·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보이는 전통 계열의 종이다.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종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의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 및 사원경제구조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룡사 홈페이지 내용 인용)이외에도 이 절에는
청룡사영산회괘불탱 (靑龍寺靈山會掛佛幀)
보물 1257호 조선 효종
청룡사감로탱 (靑龍寺甘露幀)
보물 1302호와 같은 보물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청룡사 가는 길은 우선 어디서던지 안성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리하다.
안성읍내에서 진천쪽으로 가는 길을 잡으면 된다. 청룡사를 거쳐 진천으로 가는 길에는
참숯가마들이 수십군데가 모여 있어서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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