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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스님의 흔적이 흐려지는 백담사여행기 2006. 10. 11. 15:21
한용운 스님의 흔적이 흐려지는 백담사
설악산 자락의 큰 절을 꼽으라면 역시 백담사와 신흥사일 것이다. 신흥사는 동쪽에
백담사는 서북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설악산을 양분하고 있는 느낌의 사찰이다.
백담사는 인제군에서 설악산 대청봉이나 마등령, 용아장성릉, 봉정암, 오세암등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시점에서의 백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백담사하면 퍼뜩 머리에 스치며 떠오는 풍경은 외형상 인물이 아주 닮아 보이는
두사람이다. 한사람은 민족의 영원한 독립투사이며 시인으로 길이 존경을 받아
마땅한 만해 한용운 선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총칼로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군홧발로 부처님 성전을 어지럽힌 10.27法亂의 주인공인 全某씨다.
군홧발로 법당을 더럽힌 그가 왜 백담사와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짐작을 하겠지만 다른 많은 도피처를 두고 하필이면 만해 한용운
스님의 숭고한 흔적이 남아 있는 백담사를 택한 것일까?
불교도라면 누구나 반성을 해야 만 할 것이다. 그가 백담사를 잠깐이나마 자신의 죄를
가리는데 사용하도록 제공한 것은 이판과 사판의 대결에서 일제이후 우세를 보여온
사판승의 실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라는 세속적인 언어도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합성어로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본래 이판은 참선, 경전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살림(山林)을 하는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절의 살림을 맡는 다는 것은
경제권을 가진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정치와 결탁도 필요에 따라 어느정도 허용하게 되어
자연히 속세의 풍파와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만해스님의 사진이다. 얼핏 보면 한 때 세속의 권력을 탐했던 그가 닮지 않았는가?
지금의 백담사에는 주법당인 극락보전 앞 요사채에 일요일이면 등산객들이 모여든다.
그리고는 만해스님이 머물렀을지도 모르는 작은 방앞에 놓여진 全某씨의 사진과 그가
머물렀던 방이라는 안내판을 보느라 법썩이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흔적은 옆켠으로 밀려서 기념관이라는 건물로 남아 있다.
스님의 동상과 시가 새겨진 돌비 앞에서 30분이나 지켜 보았지만 절에 들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념관 따위야 관심도 없다.
가끔씩은 내가 불교도인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때도 있다.
백담사는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
(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신라시절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주변의 산에 짐승이 많아
전국의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산의 샘물이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의 스님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스님들과 객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르게 천지개벽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
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져서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가 떨어져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구전들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 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이름을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1455년 6번째 화재로 불에 타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지금의
이름인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숱한 화재와 전쟁을 겪은 사찰답게 뜰에는 삼층석탑 1기를 빼고는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속세 등지고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
승속을 떠나서 같은 길을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도반(道伴)의 의미이다.
서로의 마음밭을 가꾸어 줄 수 있는 도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은 평등이다.
자신의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먀 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절실한 진리인가. 누구던지 심은대로 걷는다는 것 말이다.
세상에서 무한 한 것은 없다. 돌이나 바위나 쇠와 같은 무정물들이 무한해 보이지만
그것들도 우주의 성주괴공(성주괴공)에서 벗어 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속세를 등지고 가는 것이던 그들이 가고자 하는 세상을 등지고 나오는 사람이던
모든 것은 유한하다.
오늘 하루를 탈없이 살았다고 흥겨운가? 그대가 세상을 등져야할 때가 하루만큼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종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아닌가.
사랑
봄물보다 깊으니라
가을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육필 원고다. 그의 사랑은 어떤 색이였을까?
그가 갈구했던 사랑과 내가 누리는 사랑의 차이는 무었일까?
사실 내 가슴속에 사랑은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 뽀너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가 구경가기 http://blog.daum.net/roadtour/3194438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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