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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욕바라밀 수행의 길, 봉정암
    여행기 2006. 10. 10. 22:35


    인욕바라밀 수행의 길, 봉정암

     

     


    우리 나라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찰이 수 없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신라의 자장스님이 모셔와서 나누어 모신 5개의 사찰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험난하고 높은 곳에 부처님의 뇌사리를 모셨는데 그곳이 바로
    설악산 소청봉 아래 해발 1,244m에 있는 불뇌사리탑이 있는 봉정암이다.


    이 5군데의 적멸보궁은 이 봉정암을 비롯해서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등이다.


    이 사찰들의 특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다는 것이다. 불상을 안치할 자리에 사리탑을 향한 창을 내고 수미단
    이라고 해서 빈 방석만 올려 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모시기 때문에 흙이나 쇠, 나무등으로 깍아서 만든 형태적 불상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여기서 적멸과 사리, 그리고 탑을 이해해야 좀더 빨리 이해가 되리라 싶다.


    불교의 최고의 목표는 수행을 통하여 열반(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인데 열반이란
    니르바나의 음사이고 적멸은 그 뜻을 풀어 적은 것이다. 그러나 본뜻과는 달리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열반 또는 적멸(寂滅)에 들었다고 한다.

     

     


    다소 객적은 소리가 될터이지만 우스개 소리 하나를 하고 넘어 가자.
    어느 산골의 작은 암자에 뒷방을 차지하고 몇십년 참선하신 노스님, 그의 시좌,
    그리고 출가하지 않은 몸으로 참선에 매진하고 있는 최거사, 절의 살림을 맡은
    주지 스님이 있었다.


    하루는 노스님이 툇마루에 앉아서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시고 계시자 시좌가
    매우 걱정스레이 물었다.


    "큰 스님... 어디 편찮으신지요? 어인 한숨을 그리... "
    "휴~~~~에휴~~~~~"


    계속해서 한숨만 쉬시는 지라 불안해진 시좌는 스님옆에 앉아서 연유를 채근했다.
    마침내 노스님은 이야기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제 읍내 병원에 나갔지 않았겠나... 그래서 엑스레이란걸 찍었다네."
    "아니... 큰 스님... 무슨 큰 병이라도... "
    "아닐세... 차라리 그랬으면 나을뻔 했으이."
    "그럼 도데체 무슨 일이십니까?"


    "엑스레이를 보니 사리가 없더란 말이지..주지와 최거사가 얼마나 고소해 할꼬."


    우스개 소리지만 속가의 사람들은 명망있는 큰 스님이 열반에 들고 나면 다비식때
    과연 사리가 얼마나 나올까? 하고 궁금해 하고 그 사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열반전
    스님의 덕의 깊이를 가늠하려고 든다.


    불가(佛家)에서 사리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현생부처인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야말로 최고의 종교적 숭배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탑(탑)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의  "사라"라는 나무 두그루 아래에서
    인간세계의 인연을 다하시고 열반에 들게 되시자 인도의 전통방식인 화장(다비)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다비를 마치고 나자 부처님의 육신은 온몸이 사리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등 전쟁에 이르게
    되었으나 서로 조종이 이루어져 당시 국력이 비슷하던 여덟나라가 분배를 해가서
    탑을 조성하고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탑의 시원(始源)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지 300여년후에 인도에는 아쇼카왕이 통일국가를 완성하고
    강력한 불교국가를 세웠는데 이때 8개의 초기 사리탑을 헐어 전국에 8만4천개의
    탑을 세우고 나누어 모시게 했다.


    그후 인도의 불교가 쇠락하면서 사리는 구법승들의 손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고
    우리나라도 고구려,백제,신라릐 많은 스님들이 당나라를 통해서 사리를 들여오게
    되었는데 자장스님이 모셔온 사리를 5군데 모시니 곧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그중에서도 봉정암은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강원도라는 지리적
    장애로 참배가 쉽지 않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다. 쉽고 어렵다는 용어는 결국
    인간의 편의가 만들어 낸 핑계거리일 뿐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던지 참배가 가능한
    곳이니 어렵기도하고 쉽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봉정암 주변에 나무로 만든 헬기장이 있어서 서울의 돈 많은 신도들이
    헬리콥터를 전세내어 쉽게 올라서 거금을 희사하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위의 고하, 금전의 다소유무를 불문하고 스스로 올라야 하는 곳이
    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평등한 성전이 되었다 할 것이다.

     

     


    봉정암을 가려면 우선은 강원도 홍천을 거쳐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용대리로 가야한다.
    여기서 백담사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아침 6시부터 20~30분 간격으로
    백담사 앞까지 1인 2,000원을 받고 운행한다. 10분 남짓 걸리는 짧은 거리를 가는데
    2,000원이 비씨다고 툴툴대는 사람들도 꽤나 있던데 여기는 12월초부터 3월말까지
    눈때문에 운행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때 먹고 살아갈 방편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백담사 앞에서 여장을 다시 챙기고 계곡을 따라 백담 계곡으로 들어서 2시간을 걸어
    도착하는 곳이 영시암이라는 곳이다. 영시암에서는 두갈래길을 만난다.
    한 길은 오세암을 통해 오르는 길... 다른 길은 봉정암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다.


    영시암을 지나면서 부터는 길은 오르막과 바윗길이 연이어 진다. 때로는 숨이 가빠
    허덕대기도 하지만 이 길이 인욕바라밀(忍辱)의 길이다 생각한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쌍폭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절경들을 두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 또한 자신과 싸우는 인욕(忍辱)의 길이다.


    잿빛 보살복을 입은 노 보살 한분이 한손에 긴 장대를 쥐고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오르고 있다.


    "봉정암에 한번 오른게 소원이였지요... 앞으로는 더 힘이 들것 같아서... "
    "이번 걸음은 나보다 더 불편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올수 있을지 없을지
    살피는 길이디도 하지요... 다음에 같이 오려고... "


    얼마나 눈물나는 보시행(布施行)인가 말이다. 수행이란 늘 살아가는 데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마음 한 자리만 돌려 먹는다면 말이다.


    봉정암 아래 마지막 오르막인 깔딱고개에 닿는다. 숨이 차서 길섶의 작은 바위에
    두발을 잠깐 의지하고 비껴서서 봉정암으로 오르는 수 많은 사람을 만난다.
    세간에서 스쳐 지나가는 많은 의미없는 사람들처럼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스쳐서 지나간다. 많은 사람들은 설악산의 정상으로 가지만 또 절반쯤은 봉정암에
    오르는 사람들이다.

     

     


    다들 무슨 염원을 품고 오르는 길일까?
    팔순에 가까운 노인부터 열살 남짓의 아이까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오르고 오르는
    저들의 진정한 염원은 무었일까? 모두들 개인적인 염원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교리적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염원은 욕심(慾心)에 가깝다. 불교는 가장 기본적으로
    인연법(因緣法)이다. 내가 심어야 거두는 것이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걷어야 하고
    팥을 심으면 팥을 수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즈음에는 유난히 대입수능에 대한 기도가 많다고 한다. 수능에서의 좋은 점수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효울적으로 공부하는데서 출발한다. 아무리 열심으로 부모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점수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하면 아무 생각을 한하려고 한다. 그저 "석가모니불"만 외우려 한다.
    그래도 가끔은 나도 모르게 개인적인 염원이 실릴 때도 있다. 어리석음이다.


    50~60도의 경사는 육체적 능력이 있다고 빨리 오를수도 없는 고개다.
    앞 사람이 빨리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추월로가 없는 길에서 앞 사람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어야지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남에게 나를 맞춘다는 것은 아주
    크나 큰 지계(持戒)의 바라밀이다. 계율이란 원래 승단생활을 위한 것이였으므로
    나와 남과의 관계가 더 크기 때문이다.

     

     

     


    봉정암 바로밑은 더욱 가파른 길이라 거의 무아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
    봉정암에 간다는 생각도 내가 누구라는 알음알이도 설악산의 짙어가는 가을빛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잠깐의 시간이 찾아 왔다. 그저 길을 따라 위를
    향해 허위 허위 오를기만 할뿐...


    아마 잠깐 동안이였지만 온전히 자신을 잊고 있음은 선정(禪定)에 들었던 것같다.
    부단한 정진(精進)의 끝에 오는 열락의 기쁨처럼 그렇게 찰나같은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봉정암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불뇌사리탑 앞에 섰다.
    108배를 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몇 시간 동안의 산길을 오른 무릎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뭣고?"... 나는 무었이란 말인가? 정신이 나인가? 아니면 육신이 나인가?
    껍데기 조차도 마음 먹은대로 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무었인가?

     

    고단한 육신을 조금 뉘여 보려고 했으나 방은 이미 등산객들로 가득차서 자리가 없다.
    잠깐 마음속으로 마구니 하나가 슬며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내 사그라져 갔다.
    그래! 영원히 잠들어야 할 시간이 오리라... 오늘 하루쯤 자지 않는다고 영원히 잠들
    시간이 감(減)해 지는 것도 아닐터이니 정진(精進) 바라밀을 행하리라 한다.


    밤새도록 천수경을 외고 참선을 했다. 수마(垂魔)는 조금도 쉬임없이 주변을 맴돌며
    눈꺼풀을 공격하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힘들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 의지의 다짐이
    아니라 의지의 분해와 같은 것인지 젊었던 시절보다 몇배나 힘이 든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범종소리가 우주로 퍼져 나가고 낭낭하게
    도량석이 울려서 구석 구석까지 하루가 밝았음을 새겨 넣는다.


    미역국에 밥말고 양념된 오이 3조각으로 아침을 선채로 먹는다.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 내 공덕으로 차마 받기가 부끄럽네... 밤이 꼬박 새도록 잠과
    싸운것 외에는 없는 내가 한 그릇의 밥을 축냄은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오랜 세월동안 벼르고 묵혀서 간 봉정암...
    다시 속세로 내려오는 내내 나는 생각했다.

     

     

     


    나는 봉정암에서 무었을 버렸는가?
    나는 봉정암에서 무었을 얻었는가?
    나는 봉정암에서 갔었는가? 나의 껍데기말고 진정한 나는 그곳에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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