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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꽃과 나무, 국화와 단풍이런저런 이야기 2006. 10. 16. 13:19
10월 꽃과 나무, 국화와 단풍
가을이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10월, 이 시월을 대표하는 나무와 꽃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었을 내세워야 할까 망설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코스모스를, 또 다른
사람은 가을에 피는 많은 꽃들중에 하나를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거론할 것이다.
나는 10월을 대표하는 꽃으로 국화를, 나무는 단풍나무를 꼽고자 한다. 왜냐하면
화투 그림이 9월의 국화요, 10월의 단풍이 아니던가 말이다. 물론 화투는 왜색이짙기는 하지만 우리 투전에서 그 연원을 찾는 사람도 있는데다가 정작 일본에서는
그닥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적 오락종목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탓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성인남녀를 불문하고 고스톱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그 고스톱의
화투에는 1년 열두달을 달마다 대표적인 것들을 그림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을은 역시 국화와 단풍을 그려둔것을 보면 동양의 정서는 상호간에
어느 정도 통하는 모양이다.
화투는 월별로 대표적인 것들로 짜여져 있으니 9월을 국화로 표현했지만 실상은
음력을 기준한 것일터이니 양력이 표준화된 지금으로 치면 10월에 해당하고 단풍은
우리보다는 일본이 단풍이 늦게 들므로 그 또한 우리의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10월이
단풍의 최적기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10월을 대표주자로 국화와 단풍을 내세워도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듯 하다.
국화와 단풍은 하필 내 어릴적 아픈 기억과 찬란했던 기억의 극과 극에 서있다.
먼저 국화와 얽힌 이야기를 좀 하자. 요즈음 한참 꽃몽우리를 퍼트리는 중인 국화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6학년 무렵에 박정희 전대통령을 빼닮은 담임 선생님이
무척이나 좋아 하셔서 가을이면 몇개의 국화 화분이 교실에 놓여지고는 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몇개의 콤플렉스중의 하나가 164.5 센티라는 난쟁이 똥자루를
겨우 면한 키에 대한 것인데 어려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교탁에서 3줄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50을 앞둔 이 나이에도 버리지 못한 콤플렉스의 하나가 되었다.
딸만 셋을 낳아 기르는데 이놈들에게 장래 사윗감의 조건에 대해 생각한 바를 물으면
다른 건 다 용서가 되어도 키 작은 건 용서가 안된다는 대답으로 아비의 심장을 후비곤
해서 그 콤플렉스를 부채질 하는 것이다.
또 일전에는 오랫만에 큰 놈이 "아빠도 그만한 나이중에선 롱~ 다리야!" 그러는 거다.
"그래..고맙다! 키워 놓으니 애비 생각도 하는 구나.." 하고 빈말인줄 알면서도 뿌듯해
했더니 연이어 이어지는 비수같은 한마디......
"장...롱~다리!"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이면 1969년 무렵이다. 그때 내가 짝사랑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당시로선 제법 규모가 큰 빨간 벽돌 공장집 딸래미였다.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성숙해 보여서 마치 처녀 같았는데 서울에서 전학을 와서인지
얼굴도 뽀얗고 옷도 늘 하얀색 계통의 드레스 같은 것을 입고 다녔다. 그랬지만 1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나는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했다.
그녀는 같은 줄의 제일 뒤에, 나는 그 줄의 맨앞에 앉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키에 대한
내 콤플렉스의 근원이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는 담임께서 교탁에 놓여있던 조그만 국화 화분을 들더니 수업중에 물을 좀 주어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물을 듬뿍 멕여서 다시 교실로
가다가 잠깐이라도 그녀 옆이라도 스쳐 볼 양으로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우리분단은 복도쪽으로 있었다. 문을 열고 그녀의 화사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싶었는데
갑자기 중력에서 해제된 우주 비행사처럼 잠시 허공에 머무른 느낌을 받았다.
"퍽"
"챙그랑"
발에 무었이 걸렸었는지 나는 그녀의 책상위에 국화 화분을 엎었고 그녀의 드레스에다가
물에 젖은 진흙을 잔뜩 튕겨 놓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도시 기억이 없다.
그날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내 첫 사랑이 깨진 건 순전히 국화 화분 때문이다.
단풍... 특히 화투에 그려진 단풍과 사슴 한마리는 같은 무렵 나를 천재의 반열에 올려준
유일한 그림이다. 나는 방학이 되면 항상 구포에서 밀양이 있는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외조부와 외조모로써는 내가 첫 손주였기 때문에 그 내리사랑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외가는 수산면에서 밀양군으로 가기전에 있었던 은산리라는 곳인데 그곳에서 30리쯤
떨어진 곳에는 작은 외가라해서 외조부의 친동생이 솔가를 이루고 있었다. 국민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이어서 이제 중학교가면 자주 오지는 못하리라 해서 외조부와 외조모의
배려도 한층 더 깊은 때였다. 나는 만화에 빠져서 공책의 여백이나 조그만 공간의 종이만
보이면 그림을 그리곤 했던 때였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나서 외조부 방에서 노는데 큰외가에 갔던 외삼촌이 급히 왔다.
외조부의 허락을 받고 나는 외삼촌의 산천리표 호차(짐자전거)에 실려 삼십리 자길길을
달려서 도착한 작은 외가에는 농한기면 어디서던지 벌어지던 화투판이 한창이였다.
당시의 화투는 앞종이와 뒷종이 사이에 석회를 넣어서 빳빳하게 만들만큼 공정이 복잡하고
고급이어서 비쌌고 시골에서는 구하기도 쉽지 않은 물건이였다. 수산이나 밀양에서 열리는
장날이 되어야 새 화투를 구할수 있을 것인데 화투 한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투상표가 인쇄된 한장을 모자라는 화투 대신에 넣고 하니 자꾸 헷갈려서 안되겠다는
중론에 그럼 그림이라도 그려 넣자 하고 "내 조카가 그림은 잘 그린다" 해서 데려온 것이다.
내 앞에는 두장의 화투가 놓여 졌다. 한장은 상표가 인쇄된 것이고 다른 한장은 단풍그림이
그려진 화투였다. 그리고 까만색,빨간색,청색 모나미 볼펜 세자루......
"여게다가 단풍은 이것과 똑같이 그리고 가운데다가 사슴만 한마리 그리 넣어면 되는기라..."
"그게 우째 사슴이고... 고라니를 그리야 된다카이"
"고라니나 사슴이나 생긴거는 비슷하이 아무꺼면 어떻소?"
상표가 그려진 화투의 표면을 도루코 면도칼로 살살 벗겨내고 백지를 풀칠하고 3가지 색의
볼펜만으로 단풍을 그렸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본 사슴 한마리를 그려 넣었다.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 잘 그리네... 어린기 대단하다"
"야~ 글마... 잘 키우믄 그림쟁이로 대성하겠네"
"그르게 말이요..참 잘 그리네.."
"천재났네...천재났어..."
데라(일본말인데 우리말로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모은 것에서 얼마간 돈을 줬다.
따지면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렸으니 그림으로 얻는 내 첫 소득이였던 셈이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외삼촌의 자전거에 실려서 외가로 돌아왔는데 지난 밤의 내 활약상을
외조부께 자랑했다가 외삼촌은 혼줄이 났다.
"머라카노? 얼라한테 그기 무신 말이고? 근이(나를 그리 불렀다.)는 사주에 높은 벼슬을
한다켔는데 그림쟁이가 뭐꼬...."
범생이 회사원으로 살고 있으니... 그림쟁이도 못되었고...사주 믿을 것 못되는거 확실하다.'이런저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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