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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포항 호미곶에서..여행기 2006. 6. 27. 18:02
비오는 포항 호미곶에서..몇시간 달려왔는데 오전 약속이 비로 순연되었다.
주머니의 잔돈처럼 부스러기 시간이 남을때는 여간 고민되는게 아니다.
화끈하게 약속이 취소가 되어 버리던지 하면 아예 목적지를 나름대로 정할
수가 있을터인데 2시간 정도의 짜투리 시간이야 말로 참으로 어중간 할 수
밖에 없다.
에라~ 목욕이나 하자 하고 포항에서 연일로 차를 몰다가 언뜻 등대박물관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목욕이야 언제던지 할수 있는것이고 등대박물관은 몇번이나 간곳인데다가
짜투리 시간이 그것 까지는 허락치를 않는다.
비오는 호미곶을 보고 오는 것도 괜찮으리라....
포항에서 구룡포까지 잘 딱여진 신작로를 달렸다.
해안도로를 타면 훨씬 운치있기는 할것이나 시간상으로 보아서 빠른 길로
가는게 나중에 돌아올 때 여유가 있으리라.
구룡포항의 쉬는 어선들 옆을 지나사 잠깐의 해인도로를 타고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도착을 했다.
장미....
나는 한번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장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 모두 좋다고 하는 장미를 말도 안돼는 이유로 싫어한다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싫은 것은 어쩌랴...
비....
비는 무척 좋아한다. 오히려 비를 즐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가랑비나 이슬비처럼 조금씩 감질나게 오는 비 말고 우장 내리는 소낙비를
좋아한다.
그렇게 내리는 비를 우산을 받고 걸을때는 발부근에 튀는 빗방울의 모양이
내 잠들어 있는 감성을 두드리는 노크같아서 좋다.
차의 얇은 철판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좋아한다.
비와 장미....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장미와 무지하게 좋아하는 비가 서로 만났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마음도 여유로와 지는 것이어서 비를 흠뻑 맞고 늘어진
장미가 어쩐일인지 애잔해 지는 것이다.
비오는 호미곶....
조금은 낯설은 이 광장에서 제일먼저 여행객을 맞아 준것도 비맞은 장미였다.
오늘은 빗물에 누릿한 내음도 씻겨갔을 터이니 조금은 좋아 해주어야 겠다.
지금은 두어사람 겨우 비좁게 타는 쪽배도 GPS라는 첨단 기기가 있다.
예전처럼 북극성을 보고 북쪽을 가늠하거나 등대불빛이나 싸이렌에 목숨을
의지하는 뱃사람은 없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GPS나 레이더로 그들은 항구로 정확하게 찾아들어 온다.
호미곶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할일을 점점 잃어가는 등대는 배에 싣고 다니는 GPS가 고장나는 요행만
바라고 서서 점점 박제가 되어 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할일이 없어지면 박제가 되어 가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우리의 삶도 결국에는 박제가 되어 가리라는 것을 느낀다.이 손의 자세야 말로 달관의 표식이다.
눈이 오면 오는대로 받아주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움켜지지 않음으로 눈이던 비던 마음대로 떠날수 있다.
바람도 이 손가락 저 손가락을 자유롭게 누빈다.
오므리지 않을것을 알기 때문에 우르렁~ 바람은 울지 않는다.
받아주되 구속하지 않는 것....
내 마음도 늘 저렇게 자세되어야 하건만 마음공부만은 늘 녹녹하지 않다.
바다는 무었을 소망하는 것일까?
무엇을 움키려는 것일까?
사람들은 항상 바다에서 무었인가 취해 가려고만 한다.
우리가 바다에 주는 것은 오로지 배설뿐이다.
섦은 사람도 바다에 설움을 오바이트 하고 가고 외로운 사람도 외로움 뱉고간다.
사람들에게 바다는 오로지 배설로서의 용도로만 다가가 있다.
바다도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1999년 12월 31일..이곳에 일출이 있었다.
2000년 1월 1일에도 또한 이곳에서는 어제와 다름없이 장엄한 일출이 있었다.
어제의 일출과 오늘의 일출은 정녕 달라진 것일까?
10,000년 전에 이 땅의 선조들은 바이칼의 차가운 물위에서 그때의 일출을 보고
환호했으리라...5,000년 전에도 백두에서 누군가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 수많은 역사의 매듭들 중에서 2000년이라는 기준을 마음대로 정해서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억하기 위해 돌에 새기고 유리로 불씨를 보관하고 있다.
인간들의 기준이란 참으로 비합리의 바탕에 그려진 낙서 같은것이 아닌가?연오랑과 세오녀....
이 호미곶...호랑이 꼬리로 알려진 땅에서 이들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삼국유사에서 잠시 가져와 읽어보자.
---------------------- 삼 국 유 사 -------------------------------------
동해, 그 바닷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해초를 뜯고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는데 홀연히 전에 보이지 않던 바위
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싣고서 바다로 떠났다.
연오랑은 일본의 어느 해안에 닿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바위에 실려 온 연오랑을
보고선 범상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연오랑을 그나라의 왕으로 받들었다.
( 日本帝記를 보면 전후에 신라인으로서 왕이 된 이가 없으니 이는 변경의 마을단위
소왕이고 정말 중앙의 큰왕은 아닐것임.-반디불 小見)
세오녀는 해초를 따러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연오랑을 찾아 세오녀는 바닷가로 나갔다.
어느 한 바위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오녀는 그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연오랑을 그렇게 했듯 바위는 또 세오녀을 싣고 한 바다로 떠갔다.
세오녀는 앞서 연오랑이 닿았던 일본의 바로 그 해안에 닿았다.
바위에 실려 온 세오녀를 보고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 의아스러워 왕 연오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연오와 세오 부부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세오는 귀비로 받들어졌다.
이때 신라에선 까닭모르게 해와 달이 빛을 읽었다. 나라 안이 법석이었다.
왕의 물음에 일관은 다음과 같이 아뢰어 왔다.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이제 일본으로 건너가 벼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어 연오랑과 세오녀를 돌아오도록 타일렀다.
이미 그곳의 왕이 되어 있는 연오랑은 신라의 사신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것은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것이다. 이제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아내에겐 그가 짠 고운 명주가 있다. 이것을 가져가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 해와 달의 빛이 다시 회복되리라."
신라의 사신들은 그 명주를 받아 돌아와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왕은 곧 사신이 전하는 연오랑의 말대로 그 명주를 받쳐 들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런 뒤, 해와 달의 빛은 전대로 회복되었다.
왕은 그 명주를 대궐 안의 곳간에다 간수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리고는 그 곳간의
이름을 <귀비고>라 짓고, 하늘에 제사드렸던 그곳은<영일현>또는 <도기야>라
이름했다.
신라 제8대 임금 아달라왕이 즉위한지 4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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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간 누군가가 이글을 읽고 호미곶에 들리면 연오랑과 세오녀의 떠나간 자리에
서서 동남쪽 바다를 한번 보라.
그것이 전설이였다고 해도 바이칼에서 출발해서 이곳에서 마지막 여행을 떠나간
우리조상들의 모습이 보일것이니.....
대보항....
호미곶의 항구..대보항이다.
이곳에는 아직은 박제되지 않은 등대가 남아있다.
빨간색과 하얀색을 보고 항해사는 오른쪽으로 조타를 해야할지 왼쪽으로 조타를
해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나마 아직은 쓸모가 있는 것이다.
조금씩 박제의 길을 걷고 있는 해녀들....
이 대보항에서는 해녀들의 물질하는 광경을 자주 볼수 있다.
호미곶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 아래에서 치즈~ 김치~ 어쩌고 하면서
안 생기고 못 생기고..더러는 잘생긴 그런 얼굴들을 카메라에 담아가기만 바쁘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서 대보항을 어스렁거리면 휘익~~ 에구...에구..하는
해녀들의 숨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
해녀라고 해보았자 이제 60~70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로멘스를 기대 하지는 말 事.....그들은 지금 박제 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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