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립장군 비극의 단초가 된 고모산성여행기 2006. 6. 26. 17:19
신립장군의 비극으로 이어진 고모산성만약에 그때 이랬었다면 지금은 어떠했을까?
이런 지나간 역사에 대한 가정을 해볼때에 우리는 지나간 역사속에서 취할것도
더불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역사를 바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전국시대를 거쳐서 일부이나마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소모된
국력의 충당을 위해 조선을 침공한 동북아시아의 변란이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쟁에만 주력하고 있던 조선조정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왜병들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워서 파죽지세로
북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나는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해 본다.
만약에 왜병들의 북진이 한달만 지체되었더라면 전세는 어찌되었을까? 라는
것인데 아마도 조정은 조정대로 한성방어에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 할수 있었을
것이고 산악지방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보급이 여의치 않았던 왜병으로서는
상당한 전력적 손실을 감수하였을 것이다.그럼 과연 당시의 어느 전장이 왜병의 전진을 한달정도 저지할 수 있는 곳일까?
나는 문경세제를 꼽고 싶다. 그 중에서도 문경세제에 이르기 전에 고모산성은
그 천험의 지형으로 조총을 앞세운 왜병의 발목을 잡아두기에 최적의 장소였었다.당시 조선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 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등의 경력을 쌓고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당시에 북쪽 국경인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임진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람의 명성외에는 의지 할 곳이 없던 선조와 조선의 조정은
신립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고 문경세제로
파견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
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결국 패퇴를 하고 본인도 자결을 하고 말았다.
직접 가보면 알일이거니와 이 고모산성이 있는 곳은 깍아지른 절벽이 남으로 있고
북으로는 다소의 평지가 있어서 고모산성을 공략하기에는 조총이 주무기이고
백병전을 특기로 하는 왜병들에게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최단거리로 도달할수 있는 곳이 조령..즉 문경세재를 통하는
길인데 문경세재도 천험의 요새이고 문경세재에 도달하기전 고모산성도 또한 대단한
천험의 요새로 왜장인 소서행장이 몇번의 정찰끝에 지키는 조선군이 없자 춤을 추며
통과했다는 곳이다.
얼마나 험한 곳이였으면 조선 병사가 없다는것을 알고 춤까지 추며 통과했을까?
반면에 신립이 진을 친 곳은 강가로 질퍽거리는 땅의 특성상 신립이 최고로 자랑하는
기마부대는 맥을 써보지도 못했고 왜적들은 원거리에서 조총으로 사냥연습을 하듯이
갈곳없는 조선군을 궤멸시켰다.
신립이 부하의 말대로 고모산성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았더라면 어쩌면 임진왜란의
첫승을 이룬 승장으로 기록되었을 테고 왜적은 최소한 한달은 지체되었을 것이다.
이 고모산성은 신라와 후백제의 견훤 그리고 고려의 왕건이 최고의 전략요충지로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산성을 보수하고 서로 차지하려고 했던 그런 곳이다.
이 고모산성을 통하지 않고는 문경세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될 뿐
아니라 고모산성을 통하려면 겨우 한사람씩 통과해야 가능한 좁은 통로를 가진 곳이다.
그야말로 100명으로도 능히 만명을 방어할수 있는 천험의 요새인 곳인데 고려시대
이후 몇백년 동안 이곳에서 전란의 경험이 없었던 터라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잊고
있었고 이곳에 군사를 배치한다는 것을 생각치도 못한채 모두 조령에 모였다가 다시
탄금대로 이동하는 바람에 왜군으로서는 진격로 중 최고 험난한 두곳을 공짜로 얻은
셈이 되었다.이 고모산성이 얼마나 험한지는 왕건과 고모산성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대하드라마 "왕건"이 그나마 고증에 충실하였다고 평가를 하는 바이니 아마 보신
분들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고려태조 10년(927) 9월(신라 경애왕 4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을
쳐 빼앗고서 신라의 서울에 육박하니 신라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고려 태조는 이 청을 받고서 시간을 계산해 보니 보병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정기(精騎) 5천으로 따라 잡기 위한 진군을 시작하였으나 고모산성에 이르러 진군
하고자 하니 나아갈 길이 없다.
가을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길은 없어 하는 수 없이 고모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냇물은 홍수가 져 도도히 흐르고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앞을 바라보니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바위 절벽을
가로질러 나가는게 보였다.
그것을 보는 즉시 군졸을 명하여 “토끼가 가는데 말이 못 가겠는가.. 길을 내어라.” 했다.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내어 이 험로를 통과 하였다고 하여 지금까지도
토끼비리(兎遷)이라 부른다.
옛날에 서울을 오가는 길손들은 이 길을 관갑잔도(串岬棧道:관갑의 사다리길이란 뜻)라
하여 가장 위험한 길로 꼽았다.
고모산성에 올라서 바라보는 상주..예천쪽 풍경..
저기 산에 움푹파인 곳이 영남대로의 옛길이다..
말 한마리 겨우 통할수 있는 길이라서 매복등을 하고 있으면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그런 전략요충인 셈인데 북방의 전장에서 기마전술에 능했던 신립장군을 이곳에서
전략적 실수를 한셈이다.
배경이 되고 있는 고모산성...
이 다리는 저 건너보이는 진남관 휴게소로 건너가는 다리다.
지금은 사람들만 통할수 있는 도로가 되어 있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준점(水準點)을 아십니까? (0) 2006.06.28 비오는 포항 호미곶에서.. (0) 2006.06.27 하루 700KM 여행의 기록 (0) 2006.06.25 똥간 친구..그리고 황지 (0) 2006.06.25 서쪽으로..서쪽으로... (0) 200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