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쌍봉사와 국보57호 철감선사 부도탑..
    여행기 2006. 6. 22. 21:49

    블로그앤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옮기는 글


    쌍봉사와 국보57호 철감선사 부도탑.. 
    2005-01-12 오후 12:18:04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불교문화는 서로 전하고 받는 입장이였지만
    그 문화의 차이는 엄연하게 존재 한다.
    그 중에서도 불교건축의 양식이야말로 불교가 그 나라의 건축기술이나 자연에
    훈습되어 오랜시간의 적응기간을 거쳐 그 나라의 독특함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사찰들은 주로 평지에 있으면서도 무척 중후하고 장대하다.
    땅의 넓이가 넓은 대륙적인 기질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교의 상징적인 조형물이 탑인데 중국의 탑들은 주로 전탑이 많다.
    흙으로 넓적한 벽돌처럼 구운 전이라는 것으로 탑을 쌓은 전탑이 위주이다.


    반면 일본은 습한 기후의 특성상 목탑이 무척 많다. 애초에 불교문화가
    백제로 부터 일본에 전해질 즈음에는 백제와 신라에도 목재가 탑의 주재료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잦은 전란과 화재등으로 석탑이 발전을 했다.
    그 중에서도 오랜 세월동안에도 풍화의 흔적을 덜 남기는 화강암으로 탑을
    만드는게 오랜 전통으로 남았다.
    현존하는 목탑이 한손가락에 꼽고도 남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목탑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 목탑의 전형은 이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런 면에서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쌍봉사는 우리의 잃어버린 목탑의 전형으로
    그 그림자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처음에 책에서 이 쌍봉사의 가을 풍경에서 언뜻 일본적이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았는데 그렇게 느낀것은 우리나라가 전해준 목탑의 양식이 고스란히
    일본의 탑들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쌍봉사의 탑이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할 것이다.

     

     

     

     

    쌍봉사의 첫 인상은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이였다. 쌍봉사 주차장에서
    만난 수양버들과 그 건너로 보이는 쌍봉사의 출입문은 여느 절과는 다른
    푸근함으로 다가 왔다.


    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桂棠山)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주변에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가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 건너가 남전 보원선사(748-835)의 깨달음을 얻은 철감선사(748-868)는
    이곳에 선문을 개설하여 이름을 크게 떨치니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개산조가 된다.
    그리고 철감선사의 수제자인 징효대사(826-900)는 선사의 법통을 받아 강원도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선문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융성했던 초기 쌍봉사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 제3재 집정인 최항(?-1257)이 머물면서
    세도를 부릴 만큼 번창한 세월을 누리고, 조선 세조(1417-1468)때에는 세조의
    원당사찰로서, 왕실의 명복과 안녕을 비니 절에 딸린 논밭이 사방 30리에 이르며
    노역과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그후로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드니 번영했던 사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거듭된 중창에도 불구, 세월속에 묻혀 오늘에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는 위에서 언급을 했지만 잦은 전란과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인하여 목탑이 거의 없다. 기록상에 존재하는 여러 목탑이 있었지만 없어지고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이곳 쌍봉사의 목탑만이 남아서 역사라는 것은 지키고 보존할때만
    가치롭다는 것을 후세에 교훈으로 전해준다.


    그러나 이곳 쌍봉사의 목탑은1984년 4월 한 신도의 실수로 순간에 불타 버리고 말았다.
    1986년 재건축하면서 본래의 탑 형식을 찾고자 다시 사모지붕을 얹었다고 한다.
    가능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무진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과거의 모습과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자세히 비교해 보면 팔작지붕이 사모지붕으로, 그리고 상륜부가
    첨가된 것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으며 지붕의 곡선마저도 거의 같아서 그나마
    재현에 성공을 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다.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재현의 과정에서 기술상 어려움이나 작업상의 편의성등으로
    인하여 그 원형이 훼손되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절에는 고급문화재가 많다. 인간의 세치 혀로 고급과 저급을 따지는게 가당치는
    않지만 문화사적인 가치로 가늠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국보 57호인 철감선사부도탑이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탑이 만들어진 사유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화장을 한후에 사리를 각 나라들이 나누어 갔다.
    그러나 부처님이 남긴 유일한 육체의 일부였던 사리를 두고 각 나라간에 전쟁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아쇼카라는 왕이 인도를 통일하여 사리를 모아서 전국 각지에 탑을
    쌓고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 전통이 이어져서 사찰에서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을 쌓고 경전이나 공양물들을
    넣어두게 되었는데 가끔 신문에 어느 탑을 헤체했더니 무슨시대의 무슨경이 나왔다는
    등의 뉴스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특별히 스님이 열반을 하게되면 다비라고 하는 화장을 하게되고 사리나
    유품을 보관하는 탑을 만드는데 이것을 부도라고 한다.
    해남 대흥사 입구에는 일명 부도밭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스님들의 납골당인 셈이다.
    이 부도도 이름이 크게 나신 스님들이나 오래된 역사물은 탑과 다름없는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철감 선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장보고전]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어 그의 행적을 찾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다.
    철감 선사 도윤은 통일 신라 말기에 이곳 쌍봉사에서 주석하며 신라 하대 선종사찰인
    9산 선문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을 개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쌍봉사가 사자산문의 본찰은 아니고 철감선사는 개산조로 추앙을 받는다.
    그의 제자가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에서 정식으로 사자산문을 개설했기 때문이다.
    쌍봉사와 지척인 장흥에는 보림사가 있는데 이 곳은 신라9산 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 보림사가 있다.


    반디불의 똥꼬 기획특집으로 올린 관련 포스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4)

    장흥 가지산문 보림사

    http://blog.daum.net/roadtour/2238951 <--- 클릭

     

     

     

     

    철감선사의 부도를 만나러 가는 길은 대숲이 어찌나 운치가 있는지 모른다.
    대숲의 푸르름과 댓닢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쭉쭉 뻗은 대마무 사이로 비치는 조각난
    하늘의 청명함이 눈을 시리게 한다.
    그렇게 남도의 겨울바람은 귓볼을 시리게 하지않고 눈을 시리게 했다.


    지인 중에 외국을 부단히 다녔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과 국내 답사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선운사의 도솔암에 들렀던
    때였을 것이다. 돈황의 석굴이나 중국의 석불들에 비해 너무 초라하단다.
    도데체 다녀보아도 스케일이 큰 것이 없다면서 툴툴거리길래 점잖게 한마디했다.


    "그들의 문화재는 돌이고 벽돌이지만 우리것들은 마음이 들어있지요...가만히
    보시면 절대로 주변의 자연보다 돋보이는 법이 없고 못나 보이는 법도 없잖아요..
    어느 민족이 우리만큼 자연에 순응하는 조형물을 만들수 있겠어요"


    국보 57호인 철감선사 부도탑 은 그 만큼 자그만하다.
    그러나 그 작은 부도탑을
    자세히 보면 얼마나 넓고 깊은 세계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으앵~~으앵~~~으앵~~~~


    얼마나 화들짝 놀랐는지 모른다. 조금 자세히 보려고 철 난간위로 고개를 사슴처럼
    빼넣는 순간 경보기가 난데없이 조용하던 산골을 들썩이는 것이였다.
    옆 덤불에서 놀란 꿩도 푸드득~ 나르고 감나무에 앉아서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감을 쪼던 까마귀도 놀라서 후딱 자리를 떠났다.
    한참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절대로 철난간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으앵~~으앵~~~으앵~~~~


    이번에는 조그만 디지탈 카메란데 싶어서 조금더 잘 찍어보려고 했는데 경보기는
    그것마저도 여지없이 잡아내서 또 울어댄다.
    요즈음 문화재 도둑들이 극성을 부린다고 하지만 이제 철감선사 부도탑은 바람을
    통해서만 그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선사의 부도탑 둥근 하대석에는 구름이 마치 7월 장마속 태풍을 만난듯이 소용돌이
    치는 속에 여의주를 문 두 마리 용이 놀고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위에 연잎을 말아 여덟 개의 기둥을 세워 팔각을 만들었는데 다시 그 속에 여덟
    마리의 사자가 한마리 한마리가 모두 다른 모양으로 한가롭게 놀고 있는 정경이 마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현대의 동물원의 사자들이 노는 모습을 보는 듯 실감이 있다.

     

     


    중대석 여덟 면에는 안상(眼像: 사람 눈 모양)을 만들어 그 안에 가릉빈가상을 새겼다.
    가릉빈가는 우담바라라는 꽃처럼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로 극락에 살며 새의 몸에
    사람의 머리와 팔을 가졌으며 그 노래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한다.

     

     

    상대석에는 하늘을 향해 활짝핀 연꽃잎을 새긴 다음에 나지막한 8각의 받침대를
    놓았는데 이 받침대는 전체적으로 너무 정교하게 조각을 하여 따로 조각을 한 다음에
    가져다 붙인듯한 착각을 하게 할 정도다.


    여덟 개의 받침대 다리들 사이마다에 안상을 새긴 후 나팔, 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상을 여덟 면에 새겨 넣어 상대석 또한 무척 섬세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부도탑의 중심이며 사리나 유물을 보관하는 탑신에 시선에 시선을 돌려보자.
    그런데 하대석과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들의 화려함에 비해 탑신이 오히려 검소해 보인다.
    아마도 검소와 청빈 그리고 무소유를 근본으로 지향하는 스님들의 세계를 그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탑신은 여덟 개의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벽면에 천왕상(四天王像)과 비천상(飛天像)을
    2면에 모시고, 남은 2면에는 문을 내고 그 누구도 열지 못하게 자물쇠(문비)를 굳게 잠근
    모습을 얕은 돋을 새김을 하였다.
    이런 자물쇠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탑들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 모습이다.


    탑신의 사천왕상과 비천상은 가로막힌 철난간과 여차하면 산골을 으앵~ 으앵~하고
    울어 대는 경보기 때문에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날개 옷의
    주름살과 매듭들의 사실적인 조각묘사가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게 한다.

     

     


    탑신을 덮는 지붕돌(옥개석)은 기와의 암막새와 수막새를 새기고 완만한 지붕 곡선과
    기왓골 그리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서까레까지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그 시대의
    기와형태의 건축물의 모습을 가늠할 수있게 해준다.


    사라진 상륜부는 부도탑의 첫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다.
    어느날 인사동 골목의 골동품상 좌판위에서 누군가가 발견하던가 아니면 가까운
    논밭에서 곡괭이에 걸려 나왔다는 뉴스를 기대하는 마음도 그득해졌다.


    이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각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에 만들어진 또 다른 탑은 지리산 연곡사에 있다.

     

     

     

    다음은 바로 옆에 있는 보물 170호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 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입에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는지 마치 겨울의 찬바람에 콧구멍에서 콧김이 휑~휑~
    하며 나오는 느낌이 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는데 석공은 무었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한국불교의 근본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 선불교의 시원인 9산 선문중
    사자산문이 여기서 첫걸음을 했다는 뜻을 새겼는지도 모르겠다.


    비문이 없어 졌다는 것은 두가지의 가능성밖에 없다. 첫번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숭유억불로 유생들의 불교문화재 노략질이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는데 심지어는 절의
    비문을 가져다 표면을 깍아내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두번째는 임진왜란인데 왜병들 못지않게 많은 일본승들이 우리나라에 종군을 했고
    그들에 노략질해간 문화재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우리의 사라진 문화재 대부분은 지금도 일본사람들의 장롱속에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대륙침략을 가장한 우리 문화재와 도자기기술자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다.
    일본은 임진왜란과 근세의 강점기를 통해 거의 씨를 말리다싶이 싸그리 가져갔다.
    어쩌면 사라진 철감선사의 비문은 온전하게 일본놈의 손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