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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장읍성에 잠깐 들리다.
    여행기 2006. 5. 6. 15:52

     

    무장읍성에 잠깐 들리다.

     

     

     

     

    이글을 읽은 2006년 5월 6일 현재를 기준으로 40대 이상의 나이라면  "무장~"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해 질 것이다.


    일년에 서너번은 무장공비 이야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렸으며 한번 이 말이
    나오고 나면 몇달간은 온 세상이 한동안은 엄숙해 지기 때문이다.


    고창군 무장면에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간판이 "무장치안센터"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무장치안센터도 있고 비무장치안센터도 있다는 말인가 싶다.


    그러나 무장은 지명이다. 한문으로 茂長으로 쓰여지고 武裝과는 다르다.


    전봉준 생가를 들렀다가 청보리밭 축제장을 들리는 길의 가운데 쯤에 있는데
    작년에도 들린 곳이 고창군 무장면이다. 작년에는 구시포 해수욕장에 있는 해수약찜을
    즐기는겸으로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점이기도 했던 무장기포지(茂長起胞地)를 들렀다.


    오늘은 목표가 애초에 전봉준 생가였었고 그 목표달성 이후 청보리밭이 두번째 목표가
    된 탓에 잠깐 길옆에 있는 무장읍성만 들렀다 가기로 했다.
    여행길 중간에 10분~20분의 여유를 가지면 볼것들이 널려있는게 우리나라다.

     

     

     

     

    이곳은 바닷가 이다.

    가까운 곳에 해수약찜으로 유명한 구시포가 있는 곳이니 만치 그 옛지명도 그렇다.

     

    무송현(茂松縣)의 이름은 소나무가 우거졌다는 뜻이고 장사현(長沙縣)은 긴 모랫벌을

    뜻하는 것이니 이름에서도 바닷가의 긴 백사장에 소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저절로 상상

    되는 듯하다.

     

    무장(茂長)이라는 지명은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무장읍성은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의 중간지점에 만들어진 읍성이다.

     

    '무장읍지'에 따르면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도내의 승려와 백성 이만여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당시 양반과 관청의 인력수탈이 일반 백성들과 수행에 정진

    하여야 할 승려들에게 한정되어 잇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청이 있는곳에는 항상 객사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지방으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이외에도 가운데 본관에는 궐(闕)이라는 왕을 상징하는 명패를 걸어두고

    큰일이 있거나 정기적으로 의식을 거행하여 중앙집권을 다지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좌우 건물은 신하들이 머문다는 뜻의 상징적인 의미로 조금 낮게 지어졌다.

     

     

     

    객사의 축대에 새겨진 꽃 한송이....

    연꽃같기도 하고 목련꽃 같기도 한 이 조각은 일정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축대의 한곁에

    새겨져 있어서 별스러운 감흥을 준다.

     

    그 꽃이 주는 의미는 아마도 석수장이만 알듯~

     

     

     

     

     

    우리는 일종의 상식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산다.

    가령 비석은 돌로 만드는 것이라는 따위일 것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 오면서

    무쇠를 주조해서 만든 碑들이 가끔 보인다.

    비(碑)의 뜻도 돌기둥이라는 뜻인데 시기적으로 석수쟁이가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관에서 철이 공급이 용이했던 탓인지( 관가마다 전쟁을 대비해서 무기제조용으로

    일정량의 무쇠덩이를 비축하고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아니면 돌로 만든 비석보다

    내구성이 오래다고 생각한 탓인지는 모르겠다.

     

    여러군데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무쇠로 만든 철비(鐵碑)는 두번째 보게 되는것인데

    여수의 진남관 비석군에서가 첫번째 였고 이곳이 두번째 이다.

     

     

    어떤 연유일까?

    역사의 때가 묻었지만 반듯이 서 있는 다른 비석들과 달리 깨어져 뒹구는 비석...

    워낙 역사의 부침이 험난한 시기를 살아온 우리 민족인지라 사람의 명성 역시도

    부침을 거듭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있을때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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