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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심속의 성, 고창읍성에 서다.
    여행기 2006. 5. 6. 12:48

     

    도심속의 성, 고창읍성에 서다.

     

     

     

     

    출장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큰 맘 먹고 들린곳이 고창이다.
    며칠전 아는 블로거의 청보리밭 뽐뿌질도 있기는 했지만 동학농민전쟁의 주역인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해서 들렀는데 해가 제법 길어진 탓으로
    고창읍내의 도심지에 있다는 고창읍성을 들러보기로 했다.


    이전에도 고창을 지날때마다 고창읍성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는데 가끔씩
    언론을 통해 고창읍성에서 열리는 모양성제의 사진에서 도심과의 거리가 멀어보이고
    또 산성이라는 이미지가 산길을 올라야 만날수 있다는 것이여서 늘 스쳐지나곤 했다.
    귀로에 오르면서 지도를 보니 의외로 도심에서 가까운 곳이 고창읍성인지라 시간을
    가늠해보니 해가 져서 어둑사리가 내리기까지 2시간여가 남았다.
    청보리밭 축제장에서 고창읍성까지 30여분 잡고 1시간 30분정도는 남는 셈이니
    고창읍성을 한바퀴 둘러보는데는 충분한듯 하다.

     

     

     


    고창읍성의 본래 이름은 모양성이다. 고창군의 관광안내이던지 다른 글에서 가끔
    고창읍성과 모양성이 혼재되어 나와서 헷갈릴때도 있지만 같은 이름이다.
    모양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 각지의 백성들을
    차출하여 유비 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고창읍내와 근접해 있어서 일명 고창읍성이라고도 불려지는 이성은 나주 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큰 역활을 했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145호로 국가로부터 지정된 이 성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등 전략적으로
    유효한 요충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등 22동의 관아건물,2지, 4천이 있었다고 하나 수많은 전쟁의
    여파로 대부분의 건물이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었던 것을 1976년부터 하나씩 복원해
    오고 있다고 한다.

     

     

     

     

    공북루 [拱北樓]


    이 건물은 유일하게 원상태로 남아 있었던 건물이다.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성으로 들어
    설때 처음으로 만나는 건물이기도 하다.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背面)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만든 2층 문루(門樓)이다.

    공북루 전후(前後) 사적기(事蹟記)와 상량문(上樑文)에는 순치(順治) 3년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12월에 공북루를 소건(所健)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重修)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채(正埰)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던 곳인데 관청이 있는곳이면 같이 있었던 시설이였다.


    왼쪽과 오른쪽 방에는 조정(調廷)에서 파견된 관원(菅員)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牟陽之觀)의 모양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 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牟陽珹)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堂號)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撥掘誥査)하여 확인된 유구(逾構)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
    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고창읍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육안으로 볼수는 없다. 그만큼 확실하게 높은 산이나

    망루가 없기 때문이다. 동헌의 위치가 제법 높은 곳에 있어서 수목이 울창하지 않았을

    건설초기나 조선시대에는 성내 조망이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역시나 예전에 있었다가 없어진 건물이였지만 최근에 다시 복원한 풍화루(豊和樓)이다.

    기록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했는데 중간에 메꾸어진것을 연못도 다시 만들고 풍화루도

    다시 재건했다.

     

    풍화루(豊和樓)란 역시 이곳이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풍년과 주민의 화합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복원이 진행중인 관청건물..없어진 문화재를 오늘에 이르러 복원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고증을 거쳐서 해야만 한다.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大院君)이 펼친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西洋)의 열강(列强)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門戶)의 개방을 요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攝政)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들의 위협
    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和親)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이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辛未
    洋擾)가 발생 하였다.

     

    시장의 흐름을 잘 읽어야 유능한 CEO로 평가를 받듯이 세월의 흐름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읽어야 유능한 정치인,능력있는 지도자로 역사의 매김을 받는 법인데 대원군(大院君)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단지 보수의 대변자요 수구일뿐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없었다.

     

     

     

    **** 이 사진은 고창군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고창읍성에서는 해마다 성밟기 행사가 열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중국의 대표적 명절인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그 행사가 열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은 관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단체인 사단법인 모양성제전회 주최
    하는데 각 사회단체 주관으로 전국 유일의 답성놀이, 전통혼례식, 수령부임행차재현,
    성쌓기 재현, 각종 전시회 및 축하공연, 보릿골 난장 등 다양함이 있는 축제이다.


    특히나 성밟기인 답성놀이 고창읍성에는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
    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전설과 독특한 성밟기 풍속이 전해온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저승길이
    환히 트여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전해져 온다.

     

     

     


    성밟기는 윤달, 그중에서도 윤삼월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전해져 온다. 특히 초엿새,
    열엿새,스무엿새 등 여섯수가 든 날은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더욱 많은 여자들이
    다른 먼 지방에서까지 모여 들었다고 한다.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었던 돌을 성 입구에 쌓아두도록 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공성전이 벌어지게 되면 돌은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기도 했던 터이라
    이런 행사를 통해서 보급품의 저장이라는 효과를 노린 듯 하다.
    이성을 여자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재현하기라도 하는 듯한 이 성 밟기는 겨우내 얼어붙은
    성을 다지고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슬기가 밴 풍습이다.


    보리밟기가 겨우내 얼어서 푸슬해진 땅을 다지는 것처럼 성밟기도 초봄에 해야만 하지만
    요즘에는 주로 음력9월9일에 열리는 모양성제 때에 한다.


    음력 9월 9일은 사실 중국사람들의 크나큰 명절이다. 예로 부터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은
    삼월삼짓날 이라고 해서 1년중의 새로운 출발을 다지고는 했다.
    결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의 사고와는 분명히 다르건만 어느 시기부터 이땅에
    일기 시작했던 모화사상이 아직 남아있는 여파인듯해서 마음이 쓰리다.

     

     

     

    고창읍성 너머로 석양이 나그네의 등을 떠민다.

    어느듯 하루를 정리하고 멧새들도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왔다.

    나그네도 고창읍성의 문루를 나선다.

     

     

     

     

     

    고창읍성 바로 앞에 초가가 있는데다가 안내판이 보여서 차 운행을 시작한지 1분만에

    다시 길옆으로 차를 댔다.

    우리나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다.

     

    고택과 생가는 확실하게 구분하고 넘어가자. 생가는 그 사람이 태어난 집을 말하고

    고택이라 함은 그 사람이 생전에 살던 집이다.

    가령 이사를 자주 다녔던 사람이라면 생가가 하나에 고택이 여럿 있을수 있는 것이다.

     

    신재효 선생은 우리나라 판소리를 여섯마당 체제로 집대성한 분이다.

    바로 옆에는 판소리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는데 시간이 이미 개관시간을 넘겼고 노을이

    자꾸 등을 떠밀어 길을 재촉한다.

     

     

     

    찾아가는 길..

     

    이곳 고창읍성은 찾기 쉽다. 따로 안내가 필요 없을 정도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고창나들목으로 내리면 고창읍내로 가는 길이 있고

    고창읍내로 들어가면 고창읍성 안내판이 주욱~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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