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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남자들이여!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6. 4. 30. 13:26
[키워드-이승연의 누드파문]
비겁한 남자들이여!
2004-02-19 오전 10:25:59
*** 요즈음 키워드에 글쓰는 분들이 통 없군요..쩌비~~ 혼자 늘 쓰려니 싱겁기도
한데 어쨋던 불시에 던지는 키워드에 충실하려고 무진 노력중입니다..*****----------------------------------------------------------------------
우리 사회가 수렵과 채집위주의 모계사회에서 노동력이 필요한 농경중심의 부계사회로
바뀌게 되면서 약탈과 침탈의 역사가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약탈의 제1품목은 농토의 확장이였으며 노동력의 확보였다.
게다가 다른 유전질을 요구하는 본능에 의해..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여자는 약탈물의
제 1순위였다.
약탈의 시대에서 침략자를 물리치고 내것이라 이름지어진 모든것들을 지켜내는것은
남자의 능력이 되었다.
침략자에게 지게되면 처참한 죽음만이 존재했고 여자들은 약탈물이 되었다.
옛날에는 남자라면 젊은사람은 물론이고 늙거나 병들거나 어리거나를 가리지않고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만 했다.
복수때문이였다.
후일에 벌어질 복수를 막기위해 패배한쪽은 처절히 멸종되어가야만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기술의 발전과 재배법의 개량에 의한
혁신적인 농업혁명이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전후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어느 나라나 부족 할것없이 이제는 남자의 질높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의 의미는 영토의 확장과 노예의 취득으로 변질이 되었다.
여자는 이제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전장에서 사기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침략당한 민족이나 나라의
여자를 적당히 배분하는것은 이제는 단순한 사기진작과 배설욕구를 해결하는
도구로 보기 시작한 것이 중세부터의 전쟁의 유형이 되었다.
더 이상 패배자라고 하여 무조건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라는 이름을 달고 살거나 할 뿐이였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서 일시에 약탈해 가는 것에서 이제는 수시로 요구하는
일종의 보급기지화 하는 것이 고려이후에 세계적인 전쟁의 형태였던 것이다.
그것은 공물이라는 형태로 주기적으로 요구되었으며 힘을 길러서 벗어나가나
공물의 요구처가 스스로 멸망하거나 둘중의 하나였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예전에는 전쟁에서 패배는 죽음을 나타냈지만 삼국시대이후는
전쟁에서의 패배는 치욕과 비겁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해마다 공물을 바치면서 패배자임을 자인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치욕과
공물속에 의례 포함되어 있는 여자의 징발에서 우리 누이를 멀건히 보면서 보내는
비겁함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내것이라 이름지어진 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비겁함이다.
치욕은 세월이 가면 잊혀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자각하고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주기도 하는데 비겁함이 오래되면 무신경해져서 비겁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때도 있다는 것이 더 큰 사회의 문제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도 어쩌면 이런 비겁함이 고려와 조선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특히나 남자에게만 유전된다는 특이 염색체를 통해 내리물림한것은 아닐까?
비겁함이란 이제 우리의 대표적인 유전질이 된것은 아닐까?
고려때 징기스칸의 군대에게도 그랬고 임진왜란때도 그랬다.
우리는 우리의 여자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수많은 여자들이 겁탈을 당했고 능욕을 당했으며 수많은 여자들이 타국으로 끌려갔다.
고려때는 그래도 삼별초가 목숨을 내던져서 자존심을 세웠고 임진왜란때도
결과적인 승리로 다소나마의 자존심을 세웠다.
소설 남한산성을 읽어본적이 있는가.
나는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가 얼마나 우리민족을
비겁자로 만들었는지 절감하였다.
중국은 유교를 버렸다. 그들은 버림으로서 중세의 세계판도에서 중심을 유지할수
있었지만 우리는 유교를 고집하면서 비겁의 길로 스스로 접어들었다.
개인이나 사회가 발전하려면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거나 형성해가야만
하는데 유교는 근본적으로 그길을 차단하고 있다.
김용옥교수가 지금 방송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쩌고 저쩌고하며
성리학이 어떻고 세계적인 학문이 어떻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멸치의 대장구조가 어떻고 소장이 어떻게 생겼으며 멸치의 분포가 어떻고 하는것은
인간의 지식구조에 큰 변화를 줄지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국물을 우려내는 기술이
사회의 발전에 더 큰 영향을 준다.
그가 남한산성을 읽어보고 그 시대상황을 가늠해보며 우리는을 따지기 전에
나는 무었인가라는 개인적인 패러다임을 먼저 설정하기 바란다.
아뭏던지 우리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쿠테타로 제압하고 해바라기 외교를 펼친 당시의 정치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말이였다.
유학에 기반한 양반이라는 존재들이 끼친 두번째 민족적 범죄의 결과는 한마디로
처참했다.
수만명의 여자들이 중국으로 끌려가 몸을 버렸다.
송환협상과 은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일부의 여자들은 돌아오기는 했으되
몸을 더럽혔다하여 시가로 들어갈수도 없었고 출가외인이라는 족쇄에 의해 친가에서도
받아주지를 못했다. 그들이 택할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죽음뿐이였다.
전쟁터에서도 능욕의 순간에도 그들이 믿었던것은 남자였고 고향이였으며 나라였다.
그러나 還鄕女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는것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회환의 눈물이 아니라 멸시와 모멸..그리고 강요된 자살뿐이였다.
그렇게 자살한 양반에게는 열녀문이 내려졌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상소를 올리고 그렇게 받아낸 비겁함에 대한 포상이였다.
그후 일제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 였다.
결코 우리는 우리가 비겁했음을 이야기하는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자랑스럽게 가르킨다. 우리민족은 여태껏 남을 침략해본적이 없다고..
침략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움이 안되려면 상응하는 힘을 가져야만 한다.
아니면 일본처럼 남들이 침범하기 어려눈 지정학적 이로움을 가지던지 말이다.
이승연이라는 탈랜트가 경솔했던것은 사실이다.
전쟁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기획을 했음으로 빚어진
결과임도 간과했음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있는 우리의 비겁함도 드러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왜 그렇게 벗은 몸에 열광하는가..왜 다른 사람의 섹스장면에 열광하는가...
천박해져가는 우리문화가 만들어낸 또 다른 천박함이 불러낸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다.
왜 그런 사진을 찍었을까..
너도 나도 얼굴이 반반하고 몸매가 받쳐주면 인조이든 아니던 머리에 든게 있던없던
돈주고 보는게 솔직히 말해서 남자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부인과 자식에게는 정숙함을 강요하는 이중적 잣대의 비겁함이다.
길가는 누구를 잡고 물어도 몇대 선조가 영의정이요 삼학사가 나온 명문의 자손이며
족보있는 집안의 자손이라고 이야기 한다.
누구하나도 우리조상은요..농군에 머슴출신인데 족보가 없었던터라서 가계를 잘모른다는
사람이 없다.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5~10%인 양반인 룰을 깨트리고 유독 우리나라만은 100%
양반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퇴폐문화는 세계적으로 우리만큼 즐기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해두고 그림자의 뒤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퇴폐들....
낮시간에도 미어터져 나가는 모텔들...넘쳐나는 몰카들..안마소들...원조교제들...
이번 이승연의 누드파문은 결국 우리 남자들의 비겁함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네티즌들이 분노했다고 한다.
나도 그 일원인바에야 우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우리 네티즌들이 그 동안 누드에 얼마나 열광했던가.
굳이 이승연이 아니더라도 누드라면 사족을 못쓰고 열광한것은 사실이 아닌가..
인체가 아름답다고..그렇다..인체는 아름답다.
그렇다고 벗고 다닐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벗고 다녀라.
알몸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갓태어나 꼬물거리는 그때가 아름답고 하늘색 꿈색깔의 욕조에 목욕시킬때의 그때가
아름답고 여름날 쏟아지는 햇볕에 마당에 마련된 튜브욕조에서 깔깔거리며 물장난을 칠때
그때가 아름답다.
여자의 몸은 꼭꼭 걸어잠근 안방에서 아름답다.
가끔씩 전시되는 유화속의 누드도 멋지기는 마찬가지이다.
큰 건물의 입구에 전시된 화강암이나 구리의 누드도 아름답다.
그러나 사진전의 누드는 아름답지는 않다.
이쁘다..늘씬하다..피부가 탱글탱글하다고 표현은 되지만 아름답진 않다.
아름다움은 관념적이다.
인간은 사실적인것에는 아름다움을 반값으로 느낀다.
반성하자.
내 자식에게 내 와이프에게는 정숙함을 요구하면서 나는 그 문화를 즐기는
이중적 잣대를 지닌 비겁한 사람은 아닌지 말이다.'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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