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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펜화-중원미륵불..
    그림그리는 재미 2006. 4. 24. 11:17

    펜화-중원미륵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 승자가 천하에 둘도없이 야비한 사람이였던지 아니면 잔인하거나 악독했거나
    폭군이며 배신자이거나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모든 나쁜면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그가 승자라고 한다면 역사의 기록은 그의 편일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인물로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상정하고 싶다.


    중국으로 치자면 왕건은 실제보다 너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유비같은 사람이요
    견훤은 필요이상으로 비하되고 있는 여포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사실 견훤은 상주가 본향이다. 문경새제아래 제법 너른 들을 품고있는 천혜의 요새가
    상주인데 이곳의 영주가 아버지로 아자개라는 사람이다.
    그당시 각 지역의 영주들이 중국성을 가지는게 행세하는 것으로 유행할 때일텐데
    아자개라는 이름과 견훤이라는 이름을 끝까지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부자지간이 대단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였을까?


    견훤은 평생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를 않았다.
    이미 장성하고난 다음에 아버지가 재취를 했기 때문인데 젊은 여인네에게 어머니라고
    하기도 뭐했을테고 의붓어머니의 가문 또한 막강했을터이니 밀렸다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아뭏튼 견훤의 의지처며 뒷배경이 되었던 상주에서 북쪽으로 월악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가운데 쯤으로 이름하여 중원으로 불리는 곳..한때 견훤은 이곳에 궁궐을
    지을려고 했었다.
    왜 하필이면 아버지와 경계를 잇대고 궁궐을 지을려고 하였는지 그 심리는후인이
    짐작하기 어렵우나 이곳이 험준하여 잘 축성해놓으면 든든한 요새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가늠해볼 뿐이다.


    월악산!


    주봉인 영봉(靈峰)의 높이는 1,094m이다.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붙었다고 하는데 월악산의 달뜨는 풍경은 반디불에게 남겨진 또 다른 숙제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이 곳에 궁궐을 지으려다 무산되어
    와락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견훤과 왕건의 이야기를 풀다보니 궁예가 생각난다.
    그는 왕건을 수하로 두어서 실패한 사람이다. 명색이 적통은 아니였을 망정 혼란한
    시기의 신라에서 왕통계승을 다툴수 있을만큼 핏줄이 선명한 왕족출신이다.
    그는 살아서 자기를 미륵이라 칭했고 미륵이라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또 미륵이 되기를
    간구하고 그렇게 행동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호락치 않다는 것은 정치와 이상은 항상 등돌린 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했었기 때문에 부하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불운한 사람이다.


    견훤도 왕건도 궁예도 한결같이 간구하던 미륵불!


    월악산은 그 미륵의 산이다. 그래서 견훤이 여기에 궁궐을 지을려고 했는지 모른다.
    월악산의 요모조모를 뜯다가보면 경전에 나오는 미륵이 산다는 용화세계가 그대로
    구현 되어 있어서 살가운 느낌이 드는데다가 이땅의 중앙에 가까우며 산이 험준해서
    요새가 되는 곳 그래서 그들이 여기를 두고 서로 쟁패를 벌였는지 모를 일이다.


    왕건은 견훤을 무척 두려워 했다.
    그래서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흔적마다 절을 지었다.
    후백제의 신검이 패해서 자결한 자리에는 개태사를 지었고 그외에도 몇몇의 절이
    있는데 이 중원의 미륵사지도 그 일환이 아니였을까?


    중원의 미륵사지는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자료를 보니 80,454㎡이며,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
    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고 있다.
    창건 연대나 내력은 물론 사원의 정확한 명칭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石窟式)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들이 있는데, 이는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굴사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터 안에는 오층석탑(보물 95), 석불입상(보물 96),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으로 지형이 낮아짐에 따라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사원을 형성하고 있어서
    전체적인 모양새가 궁궐의 모양새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순전히 내생각으로는 옛 견훤이 짓다가 무슨 사정으로 완공하지 못한 자리를 나중에
    고려가 건국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세운것은 아닐까?


    그러면 이렇게 한세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미륵은 도데체 어떤 분일까?


    석가모니 이후 약 56억년 뒤에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성주괴공의 법칙에 따라서 큰
    환란이 닥칠터인데 이때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주기 위해 지금 열심히 정진하고
    계시는 보살이다.


    야후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현재는 윤회의 마지막 일생을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미륵의 어원적인 뜻은 자비 ·우정을 나타내며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경전은
    《슈타니파다(Suttanipada)》 인데 여기서는 브라만 출신의 16수행인의 한 사람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는 비구로 묘사된다.
    이후 미륵의 역할은 초기 경전들에서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으며, 대승경전의 발달 후에는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차원 높은
    대승불교의 교리를 설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설정된다.
    소위 미륵 6부경의 성립단계에 와서는 미륵은 석가모니불과 같은 행적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이상적 인물로 정리된다.

     

     


    월악산 아래에서 북쪽을 굽어보며 보내고 계시는 저 미소의 뜻은 무었일까?


    미륵이시여! 난세인 지금 이나라 이땅에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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