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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사도를 보고~
    좋은글,영화,책 2015. 10. 1. 15:37

     

     

    9월의 마지막 날 매달 한 장씩 생겼다 사라지는 통신사 영화관람권 유효기간의 마지막 날이다. 이번 달도 오늘이 지나면 또 한 장이 사그라지고 말 것이라 영화 “사도”를 보러갔다. 사도는 조선 왕가 최고의 비극적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마지막 며칠을 그린 영화는 역사의 바깥으로 드러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바깥으로 드러난 왕조실록과 혜궁궁 홍씨의 기록등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의 진행을 영화는 충실하게 쫓아가고 있다. 사도가 미쳐서 궁인을 죽이고 여승, 기생들을 가까이 했으며 종내는 아비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영화는 그런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을 죽인 영조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반인들의 시선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사실 사도가 영조를 죽이려 한 증거는 없다. 또 궁인등을 백 명을 죽였다는 기록도 터무니없다. 정사기록에는 없는 일이며 단지 사도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위한 상소에 언급되었을 뿐이다. 이는 당시 정치세력들의 다툼과 협상을 통해 사도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위한 음모의 냄새가 짙다.

     

    사실 영조는 왕이 되기에는 너무 모자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천한 신분이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어머니가 누군가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첩이라도 양가집 출신의 첩일 경우 그 자식에게 서얼이라는 계급이 주어졌지만 첩이 종이거나 천민출신이면 그 자식도 종이나 천민으로 취급 받았다. 홍길동전에서 보듯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신분제도였던 것이다. 그런 신분이었던 영조가 왕이 된 것은 당시 병권을 장악한 노론의 도움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영조와 노론 사이에는 병권은 노론에게 왕권은 영조에서 서로 보장해준다는 밀약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대리청정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당시 영조를 등에 업은 노론의 분탕질로 백성들의 고통과 원성이 자자했지만 일당독재의 상황에서 모든 것은 평온으로 가장되었다. 영조가 신문고를 부활하고 탕평을 했다고는 하지만 병권을 노론이 독점한 상황은 탕평이라기보다는 당시 영조의 반대세력이던 소론을 모조리 몰아낸 상태로 노론의 정치판 독점이었다.

     

    그러나 소론도 숨죽인 가운데서 다음 대권으로 은밀히 힘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 타킷이 사도세자였다. 소론은 영조의 등극을 극렬히 반대했던 집단 이었다. 영조는 그 때문에 병권을 모두 노론에게만 주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소론과 연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은 세자의 비행에 대한 나경언의 고변이 있었을때 인데, 이때 세자는 석고대죄를 청한다. 죄의 유무를 떠나 세자라는 신분으로 고변을 당했다는 자체가 대죄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자가 대죄를 시작하고 이레가 지나도록 누구도 이 사실을 영조에게 알리지 않았다. 대개는 세자나 신하가 대죄를 청하면 즉시 왕에게 알려졌고 왕은 일정시간을 지켜보다가 대죄를 받아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보면 세자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영조는 마음속으로 세자의 대죄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기다렸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에게 쳐지는 인의 장막이 문제~~ 어쩌면 영조와 노론은 세자의 뒷배를 봐주고 있던 소론을 엮어낼 궁리를 하던 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뭏던 위기에 처한 세자가 일주일 만에 인내의 끝을 보이고 만다. "즉시 조재호를 불러오너라!~"며 도움을 청하는 조재호(1702~1762)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당시 영조와 노론의 위세를 피해 춘천에서 은둔하고 있는 처지였다. 조재호는 단지 도움을 요청받았다는 이유로 곧바로 사약을 받게 된다. 영조와 노론의 입장에서는 세자와 소론의 동시제거에 한 발 다가선다.

     

    왜 하필 뒤주였을까? 처음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칼을 주며 자결을 명한다. 사도가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선택한 것이 뒤주였다. 이 사건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마무리를 하게 되면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징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법이던 대명률에 의해 직계는 모두 역적이 된다. 영조는 결말처리에서 결국 집안문제로 아버지가 자식을 징치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 사건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것은 나경언이 세자를 고변한 사건으로 국청이 열렸을 때의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나경언이 세자를 역모로 고변했다가 이내 역모로 고변한 내용은 거짓이나 세자의 행실에 대한 부분은 사실이라고 실토했다. 이에 세자를 역모부분을 거짓 고변한 나경언의 배후를 캐야한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오히려 꾸짖기까지 하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한다.

     

    "전하!~나경언을 벌 주시옵소서!~"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 된단 말이냐!~ 오늘날 그대들이 당파 싸움을 이어 부당(父黨), 자당(子黨)으로 갈라섰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다 역적들이오!~역적!~"

     

    부당(父黨)은 영조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인 노론, 자당(子黨)은 세자를 필두로 한 신진 개혁세력의 다툼으로 이해하면 편할듯하다.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속한 당파가 달랐다는 뜻이며 세자가 아버지의 등극을 반대하며 때때로 아버지의 콤플렉스를 건드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쪽에 섰다는 뜻이다. 이미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던 셈이다.

     

    사도의 열풍에 더불어 신간 하나를 구해 읽게 되었다. '영조와 사도'(지은이 김수지·펴낸곳 인문서원)가 그것인데 서문은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 지워진 사도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가 그동안 보통으로 알고 있는 진실이면을 주목하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세자 정신병 논란은 어찌 보면 가해자들을 지독하게 온정적으로 옹호하고 피해자가 되레 혹독하게 비난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미 300년 전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또 자신의 입장을 한마디도 변호할 수 없는 사도세자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 책은 온갖 가지 이유로 피해자 사도세자에게 참화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과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다.' (6쪽)

     

    책은 영조에 대해서도 제법 정확한 통찰을 보여준다.

     

    '영조가 아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것은 자신이 세제 시절부터 평생을 불안이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기까지도 불확실한 나날이 이어졌고 즉위한 이후에도 반란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살았다. 탕평책은 사실상 영조가 왕으로 살아 남기 위한 왕의 전쟁이었다.' (301쪽)

     

    이쯤 해두고 개인에 대한 것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영조

     

    남아 있는 초상화로 보면 송강호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좀 마른 스타일로 신경질적인 이미지가 있다. 영조는 평생을 음식을 가려 먹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했다는 반증이다.

     

    영조는 콤플렉스가 매우 심한 사람이었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 신분이라는 것은 부계사회이므로 아버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농경사회여서일까? 씨보다 밭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버지의 신분이 높더라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양가 출신의 첩의 자식은 ‘서얼’, 종이나 천민을 어머니로 두었으면 본인도 종이나 천민의 신분을 받게 되는 것이 조선의 법이였다. 천한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한때는 궁궐을 떠나 평민들과 같이 생활했다. 연잉군이라는 왕자의 시호를 받았지만 주변에서는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더 크게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아들에게 왕위가 이어지는 것이 정통이었지만 그는 이례적으로 선왕인 경종(장휘빈 아들)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있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침 병권을 노론이 틀어쥐었고 병약하여 자주 앓는데다가 후사가 없던 경종을 압박하여 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강행했고, 경종이 당한 의문의 죽음을 딛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위 당시 경종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졌지만 자연사로 결론이 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조정의 발표를 믿지 못했고 남도지방을 중심으로 노론과 영조측에서 경종을 독살하였을 것이라며 대대적인 반정부 운동을 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국문장 풍경에서 남도의 선비둘이 영조에게 천한 출신과 경종의 독살을 들고 나와 그를 자극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노론에 의한, 노론을 위한, 노론의 군주라는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에 의해 왕에 올랐고 병권은 온전히 노론의 몫으로 보장해준다는 약속은 노론에 의지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무늬만 호랑이가 된 자신에 대한 회한도 있었다.

     

    이런 콤플렉스는 영조를 기분장애를 깊게 만들어 집권 중기이후에는 주변사람을 무척 괴롭게 한다. 영화에 폐세자 상소를 올리라고 영조가 사주한 신하가 영조에게 편지를 남기고 자결하는데 “기분의 변화가 극심하여 심중을 알기 어렵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하나 영조의 병증은 권력중독이다. 권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일이라는 굳은 믿음은 결국 자식이라도 자신에게 반하면 죽여서라도 그것을 유지하겠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 ( 李愃 ) 이다.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은 지 7년만인 41 세에 얻은 금쪽같은 두 번째 아들이었다. “이제 종묘에 볼 낯이 섰다”라고 할만큼 귀했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가장 큰 것은 조기교육이다. 3살 때부터 시강원을 열어 공부를 가르친다. 영화에서 사도가 잠을 잘 때 손가락을 빨며 칭얼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영화는 그의 병증이 애정결핍으로부터 연원했음을 알려주는 장치다. 시강원에서 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스승이 손으로 물을 적셔 얼굴에 퉁기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 놀이에 열중해야할 나이에 오전, 오후, 밤으로 이어지는 전일 수업은 꽤 가혹했을 것이다. 게다가 영조 앞에서 때때로 치루어 지는 시험에서는 영조는 칭찬보다는 채찍을 휘둘렀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왕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선생들은 왕자가 답변을 못하거나 잘 못된 답을 할 때 대신 체벌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 자신의 잘못으로 대신 왕으로부터 벌을 받는 스승들을 보면서 왕세자의 마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10세 무렵에는 거의 병으로 진행이 된 것 같다. 그러나 궁중 내 의원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영조에게 알려질 것이고 영조는 왕세자의 심약함에 대한 꾸중을 내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세자빈 혜경궁 홍씨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초기에는 금슬도 좋았고 장인에게 많이 의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홍씨는 노론에 속한집안으로 왕세자를 지키는데 일정부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이 편지에서 사도세자는 의원과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니 약을 지어 몰래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스스로 자처하고 있는 병은 불안과 초조함을 호소하는 불안신경증. 번개와 천둥소리조차 두려워하는 공포증(뇌벽증). 그리고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강박증(의대증)으로 스스로가 심약함으로 생기는 병임을 통념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신하들도 이런 병이 군주로서의 위치에 영향을 줄 정도로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그 원인으로 영조의 교육방식과 세자를 대하는 자세에 있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실록에 있는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전하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고 있어 대할 때 머뭇거리게 됩니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3년 11월 11일.

     

    사도세자는 사실 영조와는 달리 文보다는 武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을 잘 그렸다. 틈만 나면 활을 쏘았고 그림을 그렸다. 활과 그림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던 사도세자였다. 자신의 마음병을 걱정하면서도 군주로서의 소양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번거로우시겠지만 <남한형지>, <양향군무도서>를 보내 주심이 어떨는지요?"라고 부탁하고 있다. <남한형지>는 한강 이남의 지도이고 <양향군무도서>는 군사, 말 사료 등에 대한 책이다. 이것은 사도세자가 文에만 치우쳐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武를 보충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궁내에서도 구할 수 있겠지만 이런 책을 본다는 말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면 잡서를 본다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사도세자로 유아인이 열연을 펼쳤지만 이도 실제 사도세자와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다. 알려진 기록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살이 찌고 젊었음에도 배가 나와 영조로부터 핀잔을 받을 정도였다.

     

     “저 배나온 것을 보라. 내가 저만할 때는 그러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비만에 해당 되었을 것이다. 평생 음식을 소식하고 채식을 즐겨하며 꾸준히 자기관리를 해온 영조의 눈에 비친 사도세자는 게으르고 굼뜨며 버벅대는 부끄러운 자식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아들 사도세자였지만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면 지극히 정상적인 왕세자의 기품을 드러냈다. 그 예는 죽기 2년 전인 1760년 7월 한양을 떠나 온양온천으로 나들이 했을 때 천안 직산에서 하루 묵을 때 호종하던 병사들이 구경나온 주민들을 때려 쫓아내자 그러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로 군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8일간 온궁(溫宮)에 머무는 동안 좋아했던 궁술을 연마했고 기념으로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온궁(溫宮)은 현재 아산시 온양관관호텔로 후일 정조가 부친을 회상하며 세운 영괴대비(靈槐臺碑)가 현존한다.

     

    그러나 영조는 아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아 함께 호종한 신하를 불러 여행 중 세자의 거동과 태도에 대해 세세히 물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모두가 세자의 적이니 좋게 말할 신하가 없었다. 대사헌은 세자가 공부와 정사에 힘써야 한다고 상소했고, 좌·우의정은 몇 달째 영조에게 문안하지 않는 세자에게 알현을 재촉했다. 부자간의 거리는 하루가 지나면 이틀만큼 멀어졌고 세자의 신세는 절해고도 무인도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사도세자는 정순왕후를 좋아했던지 정순왕후가 죽자 궁궐의 뒤뜰 후미진 곳에 당을 차리고 무당과 여승을 불러 굿을 하고 천도제를 지낸다. 무당의 주요한 무구는 지금도 병기모양이 많은 것은 잡귀잡신을 제어하고 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사용했던 것들을 관에 넣어 보관했다가 나경언의 무고 때 자신에게 저주를 했다는 영조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사도세자의 말이 진실임이 밝혀졌으나 영조는 끝까지 이를 문제 삼기도 했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

     

    조선의 역사를 훑다보면 치고받는 당파의 중심에는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어느 집안에서 왕비가 되느냐, 후궁이 되느냐에 따라 그녀들은 폭풍의 핵이 되었고 그녀들 발걸음 한 자죽마다 가문이 흥망이 새겨졌다. 세자빈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세자빈 혜경경 홍씨를 좋아했고 처갓집에 의지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아들을 선택한다. 생모인 선화궁 영빈을 압박하여 영조의 결심에 못을 박는 역할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노론으로부터 지아비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아들(정조)을 살리려면 영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은 딸과 외손주를 살리려고 영조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를 한다.

     

    그것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3개월여 흐른 8월 26일(음력) 세자의 장인이자 좌의정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글로 짐작이 가능하다. 1762년 윤 5월 13일에 벌어진 ‘13일의 처분’(사도세자 죽음)에 대하여 정리한 글이다.

     

    “병이 더했다 덜했다 끝이 없었고…아! 점점 도가 지나쳐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성상(영조)으로 하여금 13일의 처분이 있게 될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홍봉한은 영조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두둔하고 있다. 좌의정이라는 벼슬의 화관과 죽은 당사자의 장인이라는 무게를 지닌 사람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정당성부여라는데 큰 의미가 있는글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이자 가문의 대표이며 세자비인 혜경궁 홍씨(혜빈)를 옹호했다.

     

    “혜빈이 세손(정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상 때문이며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성상뿐’이라고 했다.”

     

    글에서 보듯이 세자비(홍씨 가문)가 지아비의 처사에 대해 영조에 대해 한 점의 원한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충성서약 같은 것이다.

     

    선화궁 영빈

     

    가장 비운의 여인이다. 후궁으로 사도세자를 낳자말자 영조의 조기교육에 대한 열정에 자식을 빼앗기다시피 하고 지켜보는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사도세자는 공식적으로 영빈의 자식이 아니라 왕후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영조에게 귀한 아들을 안긴 영빈은 특별히 영조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천한 신분으로 인하여 일생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녀의 아들 ‘사도’는 조선 역사상 최연소인 생후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고 3살에는 ‘효경’을 읽는 등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최후에는 결국 영조에게 큰 결심을 하도록 진언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아들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소식을 들으며 오열했을 여인... 가문을 위할 필요도 없었던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은 오로지 혈육의 죽음에 대한 아픔과 자신이 그것에 일조하였다는 죄의식으로 몸부림 쳤을 것이다.

     

    정조

     

    그는 불행했던 가족사를 보고 자랐다. 똑똑해야 할아버지 눈에 들고 그래야 내가 산다는 것을 너무 어릴 때 체득한 원손... 영화에서 뒤주에 갇힌 아버지에게 물 한 그릇을 바치려고 할 때 막아서는 군관에게 “너의 이름과 직책을 대라. 내 너를 기억해 두겠다.”라고 말해 그를 비켜서게 한다. 영화에서처럼 영조가 폐세자 상소를 올리라고 한 세 사람 모두 자결하는데 이는 만약 세자가 왕위에 오르거나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거나 삼족을 멸하는 대죄가 되는 까닭이다.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두고 영조가 직접 열쇠를 잠그고 직접 못질한 것도 그런 연유이다. 권력의 속성이다. 정조는 너무 일찍 권력의 속성에 눈뜨고 있다. 하긴 이때는 이미 정조는 장가를 갔으니 어른인 셈인가?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는 순간을 목격한 때가 열한 살 때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도 아마 이일은 평생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사도세자의 추존을 논하지 말라는 유언을 지켰지만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대신 새로운 궁궐을 지어 받침으로서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려고 했다.

     

    사도세자는 1899년 광무3년 조선에서 나라가 대한제국으로 바뀐후에서야 왕으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장조였다.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했으면 하고 수천 번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조선은 왕의 나라도 백성의 나라도 아니었다. 양반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였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인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나라의 정체는 분명 국민의 나라이지만 돈 있는 자의 나라, 빽 있는 자의 나라, 권력있는 자의 나라, 친일파의 나라가 아닌가?

     

    에필로그

     

    1)영조의 가장 큰 치적으로 우리는 탕평이라고 배웠다. 영조는 탕평을 국시로 선포하고 이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탕평비를 세웠는데

    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

    보편적이면서 편당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이요

    比而不周寡小人之私意

    편당하면서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 를 새겼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남아 있다.

     

    탕평은 어느 파벌에 치우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인데 영조의 탕평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은 첨예하게 대립해 있었는데 소론은 영조를 반대하는 쪽에 있었고 노론은 영조의 가장 큰 지지세력이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소론측은 대부분의 중심 인물들이 낙향하여 은거에 들어갔고 일부 남은 인물들이 조정의 구색을 맞추는 역할로 전락해 있었다. 병권은 노론이 영조를 왕위에 옹립하며 노론에게 부여된 밀약 중 하나였다. 탕평은 사실 영조의 깃발에 불과했던 것이다.

     

    2)사도세자가 15세부터 10년 넘게 대리청정을 했다. 일이년도 아니고 십년이란 세월을 대리청정을 했다는 이야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기간이 아닌가? 서로 일하는 방식이 다르니 자연히 영조의 고성과 질타가 끝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영화에도 잠깐 나오지만 병권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자가 소론을 등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어 신경이 날카로워 졌을 것이다. 그럴 즈음 나주에서 벽서사건이 발생하는데 몇 달간 국청이 열리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의 인사들이 거의 멸절되는데 영조로서도 충격이었다. 재위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경종을 독살한 원흉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소론의 존재에 영조는 맨붕에 가까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탕평을 노래처럼 불렀건만...

    이에 대한 충격은 고스란히 사도세자에게로 전가되었다.

     

    3)탕평을 논하는 자리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탕평채.

    탕평채는 청포에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서 무쳐내는 요리다. 가르거나 구별하지 않고 골고루 잘 섞어 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탕평의 정신이다.

     

    청포는 동학농민전쟁 때 불리워 졌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에서 보듯이 녹두로 만드는 청포묵은 대중적인 서민음식이었고 일반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청포묵이 많이 귀해져 대용으로 올갱이 묵을 많이 쓴다. 올갱이는 논에 사는 잡초로 농사일을 할때는 골치꺼리 였으나 요즈음 대접받고 사는 녀석이다.

     

    다음 백과 사전에서 가져온 탕평채 레시피~~~ 사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출처 분명히 밝힘..ㅎㅎ)

    탕평채

    1. 1.식재료

    2. 2.부재료

    3. 3.조리방법

     

     

    식재료

    청포묵 400g, 쇠고기(우둔) 100g, 미나리 100g, 숙주 100g, 김 2g(1장), 실고추(혹은 붉은고추) 적량, 식용유 적량, 달걀 50g(1개), 소금 약간

    부재료

    <고기양념> 간장 1큰술, 설탕 1/2큰술, 다진 파 2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깨소금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양념> 간장 1 1/2 큰술, 식초 1 1/2큰술, 설탕 1작은술

    조리방법

    1. 청포묵은 채 썰어(5×0.7×0.7cm), 끓는 물에 데친다.

    2. 쇠고기는 살로 가늘게 채 썰고(5×0.2×0.2cm), 고기 양념으로 양념하여 식용유에 볶아서 식힌다.

    3. 달걀은 흰자, 노른자로 나누어 풀어 지단을 부쳐서 채 썬다(5×0.2×0.2cm).

    4. 미나리는 깨끗이 다듬어 씻어서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치고 5cm 길이로 썰어 놓는다.

    5. 김은 그대로 구어서 잘게 부수어 놓는다.

    6. 숙주는 머리와 꼬리를 다듬어서 끓는 물에 데쳐 낸다.

    7. 준비된 재료를 간장, 식초, 설탕 양념으로 무쳐서 그릇에 담고 위에 황백지단과 붉은고추나 실고추를 고명으로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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