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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좋은글,영화,책 2015. 3. 29. 12:04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ㅣ고경태 지음ㅣ한겨레출판사

     

    책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1968년이면 내가 딱 열살때다. 1968년이면 초등학교(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제도권에 반항을 했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나른한 봄이었다. 잠은 소나기처럼 전신에 쏟아져 내릴 즈음 벽하나 건너 옆 반에서 "와~ 까르르..."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하는 각성이 전두엽을 자극했다. 한주전 담임이 교육을 간 동안 대신 수업을 맡았던 막 군대를 제대하고 복직한 총각선생님의 구수하고 아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행복한 일주일을 보내다가 그 행복감은 바로 옆반으로 넘어간 뒤였다. 옆 친구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야! 우리 쌤 바깟으면 조케따...그쟈?" 그 순간 얼핏 잠이 깬 그 친구는 두배쯤 높은 톤으로 말했다. "마따... 우리 쌤 바까스면 조께따" 박수와 함성은 바짝 마른 들풀에 불길이 번지듯 온 교실에 메아리 쳤다.

     

    그날의 이 작은 반항은 부모님들이 담임에게 불려오고 당시의 부모들이 모두 그랬듯이 "패서라도 사람만들어 달라는" 부탁과 전권의 위임에 따라 담임에게 매찜질을 당하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또 매를 맞는것으로 끝났다. 최초의 발화자로 지목된 나는 며칠간 더 곤욕을 치렀다. 첫 반항은 이렇듯 대 실패로 끝났다.

     

    내게 1968년은 그런 해였다.

     

    이 해에는 전세계적으로 반전 열풍이 불어닥친 반항과 투쟁으로 세상을 물들인 한 해였다. 파리에서 발화된 베트남전 반대시위는 유럽 전체로 번져 전 세계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불길을 미국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는 전후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일련의 운동들은 역사적으로 '68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68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회격변이었다."고 했고, 미국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프랑스 2월 혁명),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 다사다난한 1968년에 일어난 2개의 비슷한 사건은 극명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1968년 2월 12일에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 진입한 한국군 해병대원들은 당시 6살이던 응우옌득쯔응 군의 입에 총을 쏘았다. 1968년 12월 9일 울진•삼척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9살 이승복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우리의 기억속에 이 두 사건은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가 생각해보라. 우리가 일본 총리 '아베'의 망언에 보내는 비판은 얼마나 정당한가? 마치 혀 짧은 훈장님의 "나는 바담 풍(風)해도 너희들은 바담 풍(風)해야 하느니..."와 같지 않는가.

     

    김대중 정부시절 베트남 정부에 참전에 대해 사과하고 관계를 복원했던 일이 있었다. 이때 그네공주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이라더니,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앉은 지금에는 '베트남과의 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

     

    대한민국 군대는 베트남 퐁니·퐁넛을 공격해 무고한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죽였다. 그런데 왜? 잔인한 학살의 기억은 봉인된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지만 저자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 책은 고발을 위한 보고서가 아니다. 그날의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진실의 역사를 남겨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취와 모순의 뿌리를 돌아보자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 책의 목표로 느껴진다.

     

    그날 퐁니 · 퐁넛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며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과 사건들을 모아 1968년 2월 12일의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제1부 두 개의 시선’에서는 베트남 전쟁 현장, 남과 북이 삼엄한 경계 태세를 높이던 보이지 않는 전쟁의 현장을 오간다. ‘제2부 아유나무 학살’에서는 1968년 2월 12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응우옌티탄과 쩐지옙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전한다. ‘제3부 복수의 꿈’에서는 서로 죽여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베트남 사람들의 복수에 찬 이야기를 담았고, ‘제4부 해병의 나날’에서는 1968년 2월 12일의 학살을 만들어낸 한국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5부 조작과 특명’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미국과 베트남, 한국군의 관계 속에서 한국군의 1968년 2월 12일 학살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끝으로 ‘제6부 체 게바라처럼’에서는 그날의 학살 이후 변명하는 자와 묻는 자, 도망치는 자와 추적하는 자, 다시 일어서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 책속에서 ===========

     

    “무언가를 폭로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진실, 정의, 평화, 사과, 반성, 역사. 이런 좋은 말들은 저 편에 치워둔다. 기록하려는 열망으로 시작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잘 적어서 남기려는 욕심. 1999년부터 시작된 베트남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그 추동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_머리말 중에서

     

    11쪽

    '기억의 자격'을 생각한다. 1968년 12월 9일 울진, 삼척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9살 이승복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지닌 기억이다.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에 진입한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6살 응우옌득쯔엉 군의 입에 총을 쏘아 죽였다.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배제된 기억이다. 자격을 얻지 못하고 따돌림당한 기억이다. 잊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나라도 나서 특별하게 기억해주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복원해주고 싶었다.

    베트남과 연결된 1968년은 대한민국의 어떤 원점이다. 비밀스런 기원이다. 북한보다도 못 살던 한반도 남쪽의 농업국가는 어떻게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2014년)의 경제대국이 되었는가. 박정희는 어떻게 자신의 장기집권 플랜과 경제 개발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며 대한민국을 견고한 병영국가로 만들었는가. 이 책이 완전한 해답을 선물하진 못하지만 어떤 암시를 줄 것이다.

     

     

    41쪽

    하루 사이, 대한민국 서울과 베트남 투이보 마을에서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최고 권력기관의 심장부를 향했고, 하나는 민가를 향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드러내는 서술

     

     

    49~53쪽

    그날은 1968년 2월 7일이었다. 제대 일자를 손꼽아 기다려온 군인들에게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전 장병 제대 보류! 일주일 뒤엔 군 복무 기간을 6개월 늘리는 방침이 발표됐다. 육군과 해병대는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공군과 해군은 3년에서 3년 6개월로 늘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2월 7일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 전원을 무장시키고 그에 필요한 무기공장을 연내에 건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4월 1일 향토예비군대 창설로 이어졌다. 존슨 대통령이 2월에 지원키로 결정한 군사원조자금 1억 달러 중 절반이 여기에 사용됐다. 지역마다 예비군 무기고가 설치됐다. 1년 뒤인 1969년부터는 고등학교(주 2시간, 연 68시간)와 대학(주 2시간, 연 60시간)에서 교련 수업이 시작됐다.

    (중략)

    11월 21일엔 시도민증 제도가 폐지되고 주민등록증 제도가 시행되었다. 18살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13자리 번호가 부여되고, 죽을 때까지 이 주민등록증을 휴대할 의무가 생겼다. 북한 특수부대원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주민등록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급물살을 탄 결과였다. 12월 5일엔 국민교육의 기본이념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선포됐다. 초중고등학생들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로 시작하는 600자짜리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달달 외워야 했다. 일부 학교에선 학생들이 그 전문을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았고 체벌을 가했다.

    (중략)

    1968년은 대한민국 병영화의 기틀이 마련된 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군사정부의 진정한 수립은 김신조가 청와대 앞까지 내려온 1968년 1월 21일로부터 시작됐다. 사회 각 부문의 군사체제와 군사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착착 깔렸다. 베트남 전선에 투입된 5만 대군이 미국으로부터 군사비를 뜯어오는 가운데, 현역 복무 기간 연장과 향토예비군 창설, 교련 실시 등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식 시스쳄이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이 모든 것은 김신조 때문이었을까. 김신조를 보낸 북한 때문이었을까. 1967~1968년 남북한 간의 군 교전 횟수가 이전보다 10대 이상 증가했지만 전부 북한의 선제공격은 아니었다. 남북 간 충돌의 최소한 3분의 1은 남한 정부의 도발이었다 .

    박정희에겐 지속적인 위기가 필요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군사정권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 때문이기도 했다 1968년은 베트남 반전운동을 고리로 혁명의 불꽃이 세계 도처에서 타오르던 해였다. 베트남전에 참가해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 섰던 대한민국의 1968년은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는 암흑이었다.

     

     

    316쪽

    1967년 봄, 파리에서 경험했던 대중집회도 평화운동에 헌신하며 살겠다고 결심하는 중대 전기가 됐다. 그는 수백 명이 모인 이 집회 도중 손을 들고 연단에 나가 당시 베헤이렌의 이슈였던 한국인 병사 김동희에 관해 발언했다. 김동희는 1965년 7월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거부한다며 부산의 육군 병기학교를 탈영해 8월 대마도로 밀항한 한국군 병장이었다. 일본 망명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쿠오카형무소를 거쳐 오무라수용소에 갇혔다. 베헤이렌은 김동희의 한국 강제 송환을 반대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다카하시가 파리의 집회에서 언급한 김동희의 처지는 좌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 시간 뒤엔 집회의 정식 의제로 채택됐다. 집회 주최 쪽은 즉석에서 김동희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보내는 항의성명 문안까지 만들어 발표했다. 국제연대의 힘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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