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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암살"을 보고~
    좋은글,영화,책 2015. 8. 2. 01:08

     

     

    오랫만에 전지현, 이정재가 열연한 영화"암살"을 보았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과거를 덮으려는 시도하고 있는 이 즈음에 시의적으로 보면 적절한듯 싶다. 대체적 줄거리는 픽션이지만 당시의 상황적인 여러 상황들은 펙션에 가까울 것이다.

     

    비록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고 독립전쟁에 투신했던 많은 선현들이 싸워온 투쟁의 험로를 따라 걸어본 시간이었다.

     

    더러는 정말 해방이라는 것이 가능 할것인지 회의를 가지기도 했을것이고 더러는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거나 배신의 길을 걷기도 했을것이다.

     

    이 영화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약산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독립전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동안 저평가되어 온 분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김구 선생에 버금가는 위치로 비중있게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최동훈 감독의 식견이 높다는 반증이다.

     

    영화에서 전지현은 암살자의 역할을 맡아 친부를 죽여야하는 운명에서 고민하는 역할 잘 연기했다. 이정재는 배신과 이중간첩의 줄타기 연기로 영화의 긴장을 잘 이끈다. 이정재의 역할에서 오버랩되는 인물이 서 너 떠올랐다.

     

    "해방될지 몰랐지. 알았으면 그랬겠어."

     

    이 말은 독립군의 중요한 요직에 있었던 이정재가 실상은 일본군의 압잪이 였다는 반전과 해방후 경찰간부로 새로운 삶을 살다가 기소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자유를 누리기 직전 전지현에 의해 단죄되기전 하는 변명이다.

     

    미국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독립군 출신의 정계진출을 막고자 일제때 군경출신들을 대거 등용하며 면죄부를 부여하면서 친일세력은 매국노의 얼굴을 가면속에 감출수 있었다. 그런 인물들중 대표적인 인물로 세사람이 생각난다.

     

    가장 먼저 일본의 만주국 중위로 일제말 독립군 토벌에 혼신의 정열을 바치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다. 해방후 그는 군대로 숨어들어 세를 불리는데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독재자로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하는데 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였다. 조선의 명성황후 암살범의 이름이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인데 굳이 오카모토라는 성씨를 차용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친형중 큰형은 공산주의 이론의 대가였고,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 이론에 빠졌다가 빨갱이로 몰려 죽을뻔 했지만 장도영 장군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그는 집권 내내 빨갱이 때려잡는 일로 친일을 감추는 정책을 썼다.

     

    두번째 인물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노덕술"이라는 인물이다.

    노덕술은 울산태생으로 일본인(松垣米作)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 홋카이도로 취직을 위해 도일했으나 곧 귀국했다. 귀국 후 경찰관을 지원하여 1920년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9월 경남순사교습소를 졸업한 뒤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를 거쳐,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였다. 이어 순사부장을 거쳐, 1924년 12월 경부보(지금의 경감부)에 승진하고 의령·김해·거창·통영 등 각 서(署)의 사법주임을 맡았다. 1932년 경부로 승진해 울산과 서울 본정(本町:현재의 명동)·인천·개성·양주·종로경찰서 사법주임을 역임한 후,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4년 수송보안과장을 맡았다. 경찰을 재임하는 동안 독립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까지 모의 혐의까지 받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특위위원장 김상덕(金尙德) 등을 불러 그의 석방을 종용하기도 했다. 이후 무죄를 선고 받은 뒤, 헌병으로 전직하여 1950년부터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 등을 지내다 1955년 뇌물수뢰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월을 받고 파면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8년 4월 1일 사망했다. (노덕술 부분기술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함)

     

    세번째 인물은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다.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나라의 대표일진데 이번 미국 방문에서 큰절을 하거나 아부성 발언은 아마도 대물림일 것이다.

     

    김용주는 일제 때 친일 행적이 분명한 사람이다.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 해방 뒤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재산인 이른바 ‘적산’ 전남방직을 전쟁중에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

    김용주의 일제 때 발언을 보면 일본의 고대사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역사를 넘나들며 일본과 조선이 한민족 한뿌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발언의 귀결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태평양전쟁에 용감하게 나서라는 것이다. 화랑 관창처럼, 사육신 성삼문처럼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천황을 위해 벚꽃같이 지라"고 연설하였다.

     

    지금 네이버나 여타 검색엔진으로 겅색하면 김용주가 절세의 애국자로 포장되고 있다.

     

    현재는 분명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다. 따라서 과거없는 미래는 없다. 과거를 포장하고 지우려는 것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왜곡된 기형적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과거의 이런 반민족적 행위에 눈감으면서 일본으로 부터는 사과를 받으려 한다. 이율배반적이다. 올바른 판단가치철학이 우리에게 너무 절실하다.

     

    영화 "암살"이 연일 새기록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던 독립투사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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