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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시-인절미(용미리 쌍석불)/김대근삼행詩 2014. 1. 24. 14:36
인절미(용미리 쌍석불)
인중 옆 마마인듯 남은 총알자국
절단돼 아물지 않는 우리들 상처
미늘에 살이 꿰어서 살아내는 오늘
인등引燈은 흔들려 세월도 꽃잎인데
절하는 노보살 엉덩이 풍성도 하시지
미륵님 방갓위로 몸 푸는 청솔
인과는 그러하니라 입가에 걸렸는데
절간의 목탁소리 켜켜이 쌓인 위로
미륵불 쌍으로 서서 열어주시는 먼 날
인내한 세월도 이만하면 영겁이련만
절절한 그리움은 이끼로 천 년 돋아
미리내 가 닿을 그날 그대 함께 하오
註)
-미늘: 낚시나 작살의 끝에 있는, 물고기가 물면 빠지지 않도록 가시처럼 만든 작은 갈고리
-인등引燈:부처 앞에 등불을 켜는 일
-미리내:은하수의 순수한 우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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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다 보면 수 많은 군부대를 만난다. 전쟁은 잠시 쉬고 있을 뿐이라는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여정이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용암사라는 자그마한 절을 찾을 때 느낀 감정이다.
이 용암사 대웅전 서쪽으로 미륵불 한쌍이 있다. 불상의 높이는 18미터에 이르는데 본디 제자리에 있던 바위를 몸체로 이용을 한 탓으로 몸체가 다소 기형적이다.
대개의 미륵불이 그렇듯이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서쪽의 불상은 동그란 갓을 동쪽의 불상은 네모난 갓을 쓰고 있다. 동그라미의 뜻은 아마도 하늘을 네모는 땅을 나타낸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래서 동그란 갓, 즉 圓笠을 쓴 불상은 남자를 네모난 갓,즉 方笠을 쓴 불상은
여자를 나타내서 부부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불상에는 전설이 많다.
그중에 하나, 특히 그 동안 정설처럼 여겨졌던 이야기는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후궁으로 원신궁주(元信宮主 또는 공주..고려왕실은 일본 왕가처럼 대부분 왕족끼리 결혼을 했으므로 공주가 맞을듯..)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원신공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
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꿈을 깬 공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 하나는 석불앞 양지동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근데 이 부자가 놀부와 옹고집의 특성을 나쁜쪽으로 뽑아서 합성을 한듯이 아주
고약해서 동냥치는 물론이고 시주승들도 곤욕을 치루었다.
마침내 도사 하나가 시주를 하러 들렀다가 호되게 곤욕을 치루었는데 꽤심하게 생각해서 이 영감을 망해놓겠다고 작정을 하고 며칠뒤에 찾아가서는 공손하게 절을 하고는 이 뒤산 바위에다 불상을 새기고 치성을 드리면 만석꾼이 되리라고 말해준다.
욕심많은 영감이 많은 돈을 들여 조성을 했으나 그 후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서 마침내 쫄딱 망하게 되어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200여자에 가까운 명문이 발견되어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1995년에 발견된 명문에는 1465년 (세조 11년)에 국왕(세조)와 왕비(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하였다는 것이 밝혀 졌다.
한 때는 이곳 역시도 격전지였던 탓에 쌍석불의 몸통이며 목덜미며 얼굴에는 마치 마마자국 같은 총알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이 약이어서 인지 모두들 조금씩 동족상잔의 그 다툼을 잊어 가고 있다. 이제는 쌍미륵불에 난 총알자국도 점점 흐려져 가듯이 말이다.'삼행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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