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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성 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 유허지
    여행기 2009. 9. 28. 10:11

    김시민 장군 유허지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66호
    천안 병천면 가전리 460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라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 율 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이다. 이 중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을 이끈 명장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3.1운동의 영웅 유관순 열사와 독립기념관으로 유명한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의 지나다보면 길가에 노거수 한그루와 비석 하나를 볼 수 있다. 이 비가 바로 김시민 장군의 유허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이곳을 찾으려면 병천순대로 유명한 병천 읍내에서 수신으로 가는 5거리에서 강둑길을 찾아야 한다. 강둑길을 따라 가다보면 옛 이름이  잣밭마을이었던 백전마을이 나오고 작은 언덕길을 넘으면 바로 유허지가 있다.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1554(명종 9)년에 천안에서 태어나 1592(선조 25)년에 진주성 대첩을 이끈 며칠 후 적탄에 맞은 상처로 인해 세상을 떳다.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였다.


    장군은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를 시작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게 되었다. 장군은 연이은 패전소식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였다.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 진출을 위해 진주를 공략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진주부근에서의 연이은 패배를 만회하고자 대대적 공세를 편 일본은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을 동원 진주성을 포위하자, 김시민 장군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쳐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성대첩을 이루어 내었다. 이러써 일본은 한동안 서쪽으로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보급을 확보하지 못하여 전쟁은 소강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싸움에서 장군은 이마에 적탄을 맞았고 며칠 뒤 사망하고 말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이 거둔 진주성 대첩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조선군에게 자심감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임진왜란 3대첩으로 평가받는 진주성 승첩이였음에도 이순신장군, 권율 장군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 충북 괴산에 그를 기리는 충민사, 진주성에 있는 그의 동상등이 그를 기리는 전부이다. 생가 유허지에 현충사에 버금가는 기념관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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