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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항선의 종점, 장항(長項)
    여행기 2007. 5. 21. 11:59

     

    장항선의 종점, 장항(長項)

     

     

    철도 여행은 설레임과 여유, 그리고 낭만을 선사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어깨에 짐 지워진
    편리성이 늘 철도 여행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된다. 5분의 잠이 늘 아쉬운 평일에는
    일요일이면 아침 잠을 여유있게 즐기리라고 하지만 이미 길들여진 생체시계는 휴일에도
    작동을 하는지 늘 깨는 시간에 잠이 깨이게 마련이다.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장항선이 지나는 터라 일요일 아침의 느긋함 역시
    열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음이 생체시계를 더욱 강렬하게 자극을 했다.


    장항선의 끝, 장항(長項)이라는 그 낯선 곳을 와이프가 그리워 하는 투로 이야기 했다.
    그리움이란 과거의 기억을 추억함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선 길이 장항으로의 열차 여행이다.


    온양온천역에서 장항선의 종점인 장항까지는 2시간 20여분이 걸리는 먼 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의 절반을 소모하는 이 짧은 구간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가 속도이다. 자가용으로 달리면 한시간은 족히 줄일 수 있을 것이지만 느긋한 여행이
    주는 묘미 또한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선으로 이루어진 구간이라 열차가 언덕을 사이로 달릴때는 마치 숲이라는 바다속을
    달리는 창문 넓은 잠수함을 타고 가는 느낌이 든다.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초록의 빛에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초록으로 물이 드는 느낌이다. 새마을은 고만고만한 간이역들을
    매정스레 지나쳐 버린다. 역이란 기차가 닿아서 사람을 태우고 내려야 비로소 역으로써
    구실을 하는 법인데 레일을 타고 먼저 전해진 열차소식에 몸이 달았다가 휑하니 스쳐가는
    열차의 쌀쌀함에 점점 낡아가는 간이역이다.

     

     


    예산, 홍성, 대천, 서천등의 사각형의 도시들에만 잠깐씩 머물러 사람들을 태우고 내린
    열차는 마침내 종점에 닿았다. 종점이라는 끝의 개념이 강하게 와닿는 곳이지만 실상은
    서울로 출발하는 시발점도 이곳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일상도 늘 이런 종점과
    시발점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하다. 아침에 출근하는 문앞이 편안한 휴식의 종점이지만
    사회를 건강한 생산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오늘은 느리게 걷기다. 와이프와 단둘이 여행을 할때는 나의 빠른 걸음은 늘 핀잔거리여서
    오늘은 마음 먹고 느리게 걷기를 다짐한다.

     

     

     


    역에서 바닷가까지 걷는 5분여 동안 점점 퇴락해가는 포구의 모습이 오늘의 장항이 처한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군산이 있는데다가 충청도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그만큼 사람의 오고감이 줄었다. 게다가 고속도로가 뚫리고 금강을
    가로지르는 국도들이 확장되면서 총청과 전라의 교통 요충지 역활도 해낼 수 없게 되었다.

     

     


    장항에는 아직도 여인숙 간판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간판들은 손질조차 없었음을 담박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아 보였다. 그만큼 장사가 안된다는 반증이리라. 여인숙 간판의 숫자로
    보면 제법 흥청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겠다.


    사실 이곳은 백제시대 기벌포라 불리며 금강의 하구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역활을 단단히
    짊어지고 있었던 곳이다. 서기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상륙을 했는데
    대규모 군사가 상륙을 할 만한 넓은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갯벌을 건너는 동안에 백제가
    급습하지 못하고 순순히 상륙을 허락한 것이 백제로는 통한의 실책이다. 만약에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갯벌에 상륙직전에 공격을 했더라면 어쩌면 백제의 멸망은
    훨씬 더 뒷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백제가 망하고 나자 당의 야욕이 본격화 되자 이번에는 신라와 당이 격돌을 했다. 그 중에서
    이 기벌포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당의 수군이 여러차례 격돌했는데 신라는 이 기벌포의
    해전에서 당에 승리를 거두어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고 육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해
    결국 당나라를 몰아낸다. 백제에게도 신라에게도 이 기벌포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제치하가 되기까지도 이곳은 갈대밭 무성한 갯벌이 지나지
    않았다. 1929년 일본인에 의해 매립되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장항이 만들어 졌다. 1935년
    2월에는 일제의 수탈정책에 따라 금을 제련하기 위한 장항제철소가 세워져 장항을 본격적
    산업도시로 만들었다. 게다가 경기일대와 충청도의 질 좋은 쌀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부설하였는데 그것이 장항선이다. 장항선은 유난히 꼬불꼬불한데 그 경로를 자세히 보면
    대부분 쌀이 생산되는 곳으로 이어져 있다.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작한 장항, 그 장항이 점점 쇠락해 가고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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