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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29일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歷史) 2007. 1. 29. 09:39

     
    1월 29일 오늘의 역사


    국내
      1634(조선 인조 12)  오리 이원익 별세
      1893(조선 고종 30)  북한산성 수리
      1906  고종, 런던트리뷴지 기자에게 을사늑약 반대 밀서 전달
      1907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선도한 국채보상운동 시작
      1915  한말 의병장 유인석 별세
      1939  한말 의병장 박윤식 별세
      1950  청평사 불탐
      1958  주한 미군, 핵무기 도입 공식 발표
      1959  일본 정부, 재일 동포 북송 발표 
      1960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감(2.15 세상 떠남)
      1961  김회일 북한 교통상, 남북철도 연결을 제안
      1980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계원을 무기로 감형, 김재규 사형 확정
      1992  미야자와 일본수상, 참의원 연설에서 정신대 문제 언급
               일본의회에서 처음으로 "마음 속의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한다"고 발언
      1996  일본, 강제연행 조선인 징용자 1945년 3월말 현재 60만4천명으로 밝힘
      1996  전국 어음부도율, 80년 이후 최고치 기록


    해외
      1635  리쉴리, 아카데미 프랑세즈 세움
      1700  스위스 수학자 다니엘 베르누이 출생
      1819  영국, 싱가포르 식민지화
      1886  프랑스 작가 로망 롤랑 출생
      1916  실용화된 비행선 등장
      1963  영국, 프랑스의 반대로 유럽공동체 가입 실패
      1964  미국, 인공위성 새턴 1호 발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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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역사에 흔하지 않은 명재상으로 꼽히는 오리 이원익이 1634년(인조12)에 세상을
    떠났다. 김포에서 태어나 서울4학의 하나인 동학(東學)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길을 인도했다.


    이듬해 서산대사의 승병과 더불어 관군을 이끌고 명나라의 이여송을 도와 평양탈환에 공을
    세워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후 1608년 영의정이 된 그는 율곡 이이가 이루지 못했던 대동법을 실시하여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는 등 평생을 백성을 위한 삶을 살았다.

     


    한말 일본에 대항한 초기 의병운동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유인석 장군이 1915년 별세했다.
    그는 한말 서양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초기 항일의병을 주도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된 이후 민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생들의
    무장봉기가 삼남 일대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1895년말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가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했는데 서상렬(徐相烈)·주용규(朱庸奎) 등 많은 유생들이 호응했다.
    이들은 원주로부터 충주를 거쳐 제천지역에 진출하였는데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당시 유생으로써 명망이 높던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어느 정도 규모와 명분이 갖추어 지자 평민 출신 의병장인 김백선(金伯善)이 400여명의
    산포수(山砲手)를 거느리고 참가하여 유인석 부대의 전투력은 성당히 강화되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제천·충주 등 충북 일대를 석권하면서 관찰사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하여 인근
    친일군수를 처단하고, 조령(鳥嶺) 밑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 주둔소를 공격했으며, 중앙에
    보낼 조세를 군수(軍需)로 압수하는 등 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충주 일대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때, 선봉장 김백선이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며칠간의 전투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김백선은 지원군을
    요청했는데도 유생출신인 안승우가 보내지 않아 패배를 했다며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 대들자,
    유인석은 평민이 양반에 대해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김백선을 군률에 따라 처형했다.


    김백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평민으로 구성된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이듬해 5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평민출신 의병장들이 실제로 큰 전투력을 발휘하였음에도 양반출신 의병장들보다 낮은
    직급이나 훈공에서 제외되는등 사회적 모순을 유인석도 결국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도총재가 되었다.
    다시 간도로 이주한 그는 1915년 관뎬 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일생을 마쳤다.



    비행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52년 프랑스의 앙리 지파르가 만든 것이였는데 그는 3마력을
    내는 160㎏의 증기기관을 달고 길이 44m의 자루에 수소를 채운 후 이륙, 10㎞/h로 비행했다.
    1872년에는 독일의 공학자 파울 헨라인은 비행선에 내연기관(內燃機關)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1883년 프랑스의 알베르 가스통 티상디에는 전동기로부터 동력을 얻었고, 1897년 독일에서
    선체가 알루미늄판으로 된 최초의 경식비행선(硬式飛行船)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비행선들은 모두 실험용이였고 실용적인 비행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16년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만든 대형경식비행선인 체펠린 비행선이였다.


    이 비행선이 실용된 첫번째 과업은 파리와 런던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일이였고 이후로 각국은
    비행선을 군사용으로 대거 채용했다. 연합군 측은 주로 대잠수함 초계용으로 사용했다.

     

     


    1936년 독일은 비행선 '힌덴부르크호'로 대서양 횡단 정기여객수송을 시작했다.
    길이가 245m인 이 비행선은 기존의 체펠린 설계방식으로 제작되었으며, 1936년 4월 독일의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 최초로 비행했다. 최대속도는 시속 135km, 순항속도는 시속 126km였다.
    같은해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상업적인 운항을 개시, 독일-미국 간의 10회 정기왕복비행으로
    1,002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1937년 뉴저지 주 레이크허스트에 착륙하던 중 폭발하면서 화염에
    휩싸여 97명의 탑승자중 36명이 사망했다.


    이 비행선의 참사로 비행선은 더 이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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