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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1. 25. 11:35
1월 25일 오늘의 역사
국내
1395(조선 태조 4) <고려사> 37권 편찬
1886(조선 고종 23) 우리 나라 최초의 주간신문 <한성주보> 발간(1888년 폐간)
1888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출생
1930 상해 한국독립당 결성
1946 해동석경원 창설, 8만대장경 번역 착수
1948 이승만 김구, 유엔 한국위와 처음으로 회담
1954 베를린 4국(미-영-프-소) 외상회의
1965 제2한강교 개통
1977 우리 나라 최초로 남성이 간호학과에 입학
1980 고등군재, 김재규 김계원 등 6명 사형선고
1981 10.26 뒤 지속돼 온 비상계엄 전면 해제
1985 제4통신위성 지구국(보은) 준공
1994 개인연금제 실시
2003 타이페이, 한국에 대해 입국비자 면제 결정
해외
1077 성직자 임명권 둘러싼 카노사의 굴욕
1627 '보일의 법칙' 확립한 영국의 과학자 보일 출생
1874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모옴 출생
1924 제1회 동계올림픽 프랑스 샤머니에서 개막
1947 미국 밤의 황제 알 카포네 별세
1949 소련과 동유럽 5개국, 경제상호원조회의기구(COMECON) 설치
1969 미국과 월맹, 파리평화회담 첫 개최
1981 중국 정부, 강청 등 4인방에 조건부 사형 선고
1982 미국 뉴욕주 온테리오 지너 원전 증기관 피열로 방사능 유출 사고
1991 이라크 페르시아만에 원유 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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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첫 주간 신문인 한성주보[漢城週報]가 1886년 발간 되었다.
사회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게되면 정보의 흐름이 중요해지는데 자연적으로 이런 정보의
흐름을 공유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생긴것이 신문일 것이다. 신문의 연원은 생각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원시적인 신문의 형태는 로마시대의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원로원의 의사록과 평민원의 의사록등의
발표물을 총칭하는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때는 한나라의 영향으로 제후들의 집을 서울에 두게 하였는데 나라에서 반포
되는 조칙등을 요약하여 제후들의 집으로 전해주면 그 집의 집사나 가족이 다시 변방의
제후에게 전했는데 그것을 저보(邸報)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관보의 시작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선조 이전부터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매일 아침 적어서 반포하는
기별(奇別)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신문의 최초 형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선조 초에 와서는 서울의 선비들이 의정부와 사헌부의 허가를 받아서 중국관보를
모방하여 활자로 기별을 발전시킨 '조보(朝報)'를 발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형태의 최초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이 신문은 정부기구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하여 관보의 성격이였지만 목적에 있어서
국민에게 외국의 사정을 널리 알려 개화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적 성격이 강했다.
《한성순보》는 창간 이듬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었으나 갑신정변이 끝난 후인
1885년 5월 박문국이 다시 세워지면서 〈한성순보〉를 다시 복간하는 형태로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를 창간하였다.
<한성주보>는 한문기사외에 국한문혼용과 일부기사의 순한글화등으로 국민계몽에 있어서
진일보한 신문의 형태였다. 이 신문에 실린 세창양행(독일국적의 상사)의 광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기록되고 있다. 누적된 적자로 1888년 7월 14일 창간 2년 6개월만에
총 120호를 발간한 상태에서 폐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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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은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중국 춘추 시대의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동양의 와신상담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일 것이다. 이 굴욕의 주인공
독일의 하인리히 4세는 몇년뒤 굴욕을 승리로 바꾸게 된다.
1073년 당시 58세였던 힐데브란트는 교황에 취임하여 그레고리 7세가 된다. 그는 교황에
즉위하자 말자 세가지의 큰 개혁을 추진하는데 첫째로 성직매매의 풍습을 엄금하고 범하는
자를 엄벌에 처했으며, 둘째로 교직의 독신생활을 확립하였다. 이미 교직자로서 아내가
있던 교직자는 이혼을 하도록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간음죄를 범한것으로 간주하였다,
셋째는 교직자를 임면하거나 혹은 교회에 속하는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 혹은 제후
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 두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실제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황제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의 이런 정책은 당시 독일에는 치명적이 되었는데 당시 독일제국의 절반이 종교적
교역자의 소유엿기 때문이였다. 황제의 주권이 위기에 몰리자 하인리히 4세는 크게 반발
하여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하자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로마에 와서 친히 변명할 것을
명하고 황제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교황청의 감독을 파문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소환을 무시하고 1076년에 국회를 소집하여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고 '지금은 교황이 아니고 거짓수도자인 힐데부란트에게'로 시작되는 통지 편지를
보내명서 충돌은 본격화 되었다. 교황은 즉각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자 독일 내부는 동요에 휩싸였으며 교황에 사죄할 것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4세는 때가 아님을 깨닫고 교황이 와서 머물고 있던 타스카니 백작의 과부 마틸다
소유의 아페니 산중 카노사성으로 찾아 갔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아 눈 내리는 사흘동안 맨발로 성문밖에 서 있었다. 나흘째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아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나 독일의 제후들이 교황에
편들어 국회를 열고 슈와벤공 루돌프를 황제에 옹립하자 중립을 지키던 교황이 루돌프의
편을 들어 하인리히를 파문하였다. 이것이 역사에 '카노사의 굴욕'으로 기록되었다.
하인리히 측에서도 희의를 열고 교황을 파문하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에 옹립하여 군대를
동원, 로마를 포위하였다. 3년후에 마침내 로마는 하인리히 4세의 군대에 함락되고 천하를
호령하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물러났다.
굴욕을 참고 와신상담했던 하인리히 4세가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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